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들 고소득층의 소비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미국 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아울러 제기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자료를 인용해 미국의 상위 10% 고소득층 가구, 즉 연 소득이 약 25만 달러(약 3억6000만 원) 이상인 가구의 소비가 전체 소비의 49.7%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24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는 지난 1989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로 30여 년 전 36%였던 비율에서 크게 증가한 것이다.
마크 잔디 무디스 애널리틱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부유층의 재정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며 이들의 지출 역시 강세를 보이고 있다”며 “미국 경제는 점점 더 이들의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부유층 지출 58% 증가…중산층·저소득층 소비 감소
무디스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 2023년 9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상위 10% 고소득층 가구의 지출은 전년 대비 12% 증가했다. 반면, 중산층과 저소득층 가구의 소비는 같은 기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4년 전과 비교했을 때 상위 10%의 소비는 58%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21%의 물가 상승률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반면, 하위 80%의 가구는 소비를 25% 증가시키는 데 그쳤다. 이는 물가 상승률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특히 전대미문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 이후 저축했던 자산을 소진한 저소득층과 중산층은 물가 상승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 자산 가치 상승이 소비 확대 견인
부유층 소비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는 주식 시장과 부동산 가치의 상승이 꼽혔다. 코로나19 사태 기간 동안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최저치를 기록하며 많은 고소득층 가구가 저금리로 자산을 확보했다.
WSJ에 따르면 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하는 비벡 트리베디(38)는 코로나19 사태 동안 모은 저축으로 투자용 부동산 세 채를 구입했으며 본인의 주택은 코로나 사태 초기 3% 미만의 저금리로 재융자했다. 트리베디 부부는 제약업계에서 일하며 연간 35만 달러(약 5억 원) 이상을 벌고 있다. 그는 “우리 가족의 생활비가 오르긴 했지만 투자와 커리어에 전략적으로 접근해 소비는 줄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부유층 소비 위축 시 경제 타격 불가피”
전문가들은 주식 시장의 급락이나 부동산 가격 하락 등으로 상위 10%의 소비 심리가 위축될 경우 미국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크 잔디는 “상위 소득층의 소비가 미국 경제의 주요 동력으로 자리 잡은 만큼 이들의 소비 심리가 꺾일 경우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자료에 따르면 상위 5%의 가구는 해외에서의 명품 소비를 전년 대비 10% 이상 늘렸다. 데이비드 틴슬리 뱅크오브아메리카 연구원은 “상위에 속한 소비자들은 파리 등 해외로 나가 명품 가방, 의류 등을 대거 구매하고 있다”고 밝혔다.
델타항공은 지난달 프리미엄 항공권 판매가 8% 증가했고 로열 캐리비언 크루즈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예약률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유럽 리버 크루즈 등 고급 상품군을 추가로 선보일 계획이다.
◇ 소득 불균형 심화…중저가 브랜드 매출 부진
부유층의 소비 증가와 달리 중저가 브랜드는 매출 부진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가을 빅롯츠가 파산을 신청했고 코올스와 패밀리 달러 등도 매장 폐쇄에 나섰다.
매튜 보스 JP모건체이스 애널리스트는 “고소득층을 겨냥한 브랜드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들은 소비자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 “자산 보유자와 비보유자 간 격차 커져”
코로나 사태 기간 동안 쌓였던 2조6000억 달러(약 3718조 원)의 초과 저축도 상위 소득층이 대부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상위 10% 가구는 코로나 사태 이후 1조3000억 달러(약 1859조 원)를 저축해 둔 반면에 하위 90% 가구는 2910억 달러(약 416조 원)를 보유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자산 보유자와 비보유자 간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마크 잔디는 “부유층의 자산 증가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이 같은 격차 해소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