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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떠날 준비하는 미국인들”…트럼프 '골드카드' 제안 속 늘어나는 ‘해외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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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떠날 준비하는 미국인들”…트럼프 '골드카드' 제안 속 늘어나는 ‘해외 탈출 계획’

비행기에 오르는 부유층 커플의 그림. 사진=더애틀랜틱이미지 확대보기
비행기에 오르는 부유층 커플의 그림. 사진=더애틀랜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골드카드’ 이민 제도를 제안한 가운데 오히려 미국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의 수요가 더 급증하고 있다고 미국 시사잡지 더애틀랜틱이 2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미국 영주권보다 더 좋은 혜택’을 제공하는 이민 비자를 500만 달러(약 73억3000만 원)에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부유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것이며 100만장을 팔면 국가 부채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재벌)들도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이전처럼 부유하진 않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더애틀랜틱에 따르면 글로벌 자산가들을 상대로 한 이같은 ‘이민 장사’는 미국 외 국가들에서 이미 널리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미국 역시 EB-5 투자이민 프로그램을 통해 연간 최대 1만장의 영주권을 발급하고 있으며, 현재 약 100만 달러(약 14억7000만 원)의 투자 조건이 붙는다. 이 프로그램은 오는 2027년까지 시행이 연장된 상태다.
문제는 방향이라는 것이 이 잡지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의 흐름은 부자들이 미국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외국으로 나가려는 쪽에 가깝다는 것. 바꿔 말하면 시민권, 영주권, 장기 체류 비자를 확보해 해외로 ‘탈출구’를 열어두려는 수요가 오히려 급증하고 있다는 얘기다.

시민권·이민 컨설팅 전문 기업 헨리앤파트너스의 도미닉 볼렉 글로벌 프라이빗 클라이언트 부문 대표는 “우리 고객들은 순자산의 10% 정도를 이민·시민권 확보에 사용한다”며 “500만 달러짜리 골드카드를 고려하려면 5000만 달러(약 733억 원)의 유동자산이 있어야 하며 그런 사람은 전 세계에 30만명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자금 출처에 얼마나 관대하냐에 따라 (이 프로그램의 성패가) 달렸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유럽과 카리브해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민·시민권 상품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인트키츠앤네비스의 경우 32만5000달러(약 4억8000만 원) 상당의 부동산을 구입하면 약 3개월 만에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코스타리카는 15만 달러(약 2억2000만 원)를 투자하면 영주권과 시민권으로 이어지는 빠른 경로를 제공한다. 바누아투는 13만 달러(약 1억9000만 원), 도미니카는 20만 달러(약 2억9000만 원)면 여권을 살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 이후 급격히 확산됐다. 코로나19 사태 기간 동안 미국 시민들은 갑작스레 외국 입국을 거부당했고 이때 자산가들조차 국경에서 발이 묶이는 현실을 처음 경험했다는 것이다. 볼렉은 “개인 제트기를 가지고 유럽에 집이 있어도 미국 여권 때문에 입국이 안 되자 부유층은 ‘한 국가에만 시민권을 가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민 컨설팅 기업 래티튜드의 에릭 메이저 최고경영자(CEO) 역시 “과거엔 중국, 러시아, 인도, 중동 출신 부자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지금은 미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며 “지금은 미국 고위층 자체가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미국 시민들이 이같은 ‘탈출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다양하다. 총기 난사와 인종차별, 1·6 의사당 습격 사건, 기후 재난, 정치적 혼란 등 이른바 ‘미국식 불안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유럽계 혈통을 활용한 시민권 취득 시도도 늘고 있다. ‘시민권 계보학’을 전문으로 하는 래티튜드 소속 오드라 디팔코는 “할머니가 폴란드 출신이라 시민권을 신청하는 은퇴자, 학자금 대출 없이 유학을 원하는 학생 등 수요가 다양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해 아일랜드 시민권을 신청한 미국인은 3만1825명에 달했다.

이처럼 미국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플랜 B'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골드카드 제안은 정작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이민의 나라' 미국이 외려 '이민을 떠나는 나라'로 전환되고 있다는 역설적 현실이 드러난 셈이라고 더애틀랜틱은 덧붙였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