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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9] 정주영, 동생 정인영의 삼호중공업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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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9] 정주영, 동생 정인영의 삼호중공업 품다

현대삼호중공업 인수 ①
정인영 회장, 현대양행으로 분가 후 한라중공업 설립
전남 영남 조선소 등 대규모 투자했으나 자금난 봉착
대규모 구조조정 했으나 IMF 외환위기로 부도 처리

2001년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중공업 전경. 사진=현대중공업그룹이미지 확대보기
2001년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중공업 전경. 사진=현대중공업그룹
삼호중공업이 현대중공업의 위탁경영 2년 만에 흑자로 들아섰다. 1999년 위탁경영 계약 체결 당시 1000억원 적자에서 2001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800억원대의 흑자를 기록한 것. 회사 정상화를 이끌어낸 현대중공업은 2002년 4월 30일 위탁경영하던 삼호중공업의 인수를 결정했다.

5월 15일까지 삼호중공업의 지분 100%(주식 2000만 주)를 1000억 원에 매입해 최종 인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삼호중공업의 연간 대형선박 30척 건조 역량이 더해지면서 80여척의 대형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세계 시장의 20%를 차지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조선그룹으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11조 8900억원으로 자산규모가 증가해 국내 재계 15위에서 13위로 뛰어올랐다. 삼호중공업은 현대중공업 일원이 돼 현대삼호중공업으로 새출발하며 매년 매출액과 영업이익 10% 이상의 신장을 목표로 했다.

삼호중공업의 뿌리, 한라중공업의 탄생과 성장


현대삼호중공업의 전신은 한라중공업이다. 그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양행과 한라그룹의 정인영 명예회장과 만나게 된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정주영 창업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그는 형을 도와 현대그룹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1962년 10월 1일, 현대양행을 설립했다. 이것이 한라그룹의 시작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중화학공업, 특히 기계공업에 집중하기 위해 1976년 현대건설 사장직을 내려놓았다. 곧바로 창원에 대단위 기계공장 건설에 들어갔으며, 1977년 1월 1일에는 인천조선소를 설립하고 중공업에 투신했다.

인천시 중구 항동에 위치한 인천조선소는 정주영 창업회장이 설립한 현대중공업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규모였다.

이후 신군부의 중화학 투자조정으로 우리나라 최대 중공업체로 성장한 현대양행을 대우에 넘겨주고 절치부심하다가 1992년 한라중공업을 설립, 전남 영암의 삼호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1995년 7월 삼호조선소가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조선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삼호조선소는 1996년 2월 9일, 가동식과 첫 선박 진수식을 열었다. 1995년 독일과 싱가포르에서 각각 수주한 2500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급 컨테이너선과 4만t급 석유화학제품운반선이 겨울 바다에 성공적으로 띄워졌다.

정인영 명예회장에게는 삼호조선소가 재기를 위한 지렛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의 감동은 이내 차갑게 얼어버렸다. 1997년 12월 6일 국내 재계 순위 12위이던 한라그룹은 최종 부도처리되고 말았다.

중공업에 대한 과잉투자가 한라그룹에 화를 불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라그룹은 삼호조선소를 비롯해 산업기계공장, 플랜트 설비들을 건설하는 데 1조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남의 돈으로 쏟아부었다.

세계적으로 조선 경기가 좋아 대량 수주에는 성공했으나 가격 덤핑으로 채산성이 크게 악화되어 1996년 한 해 적자만 478억원에 달했다. 거기에 동남아 등지의 경기 침체로 중장비, 플랜트 수출마저 크게 줄었다.

자금난이 심화되자 한라그룹은 1997년 초부터 구조조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까지 터지며 결국 부도를 막지 못했다.

<자료: 현대중공업>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