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 철강업계의 최대 이벤트로 기록될 현대제철의 70주년 창립기념일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과 아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꿈꿨던 고로에서 최종제품까지 철강재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담당하는 ‘일관제철사업’을 실현하기 위한 첫 발판이었으며, 이를 통해 포스코와 함께 대한민국에 고로 제철소 경쟁 시대를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대제철은 이를 기념해 60주년 때인 2013년과 마찬가지로 70주년 사사(社史)를 제작, 공개하고 기념행사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제철의 뿌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에 이연 콘체른이 세운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이 모태이며, 1942년 일본 가네보 재벌 계열사 종연실업이 인수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귀속재산으로 분류됐고, 1948년 ‘대한중공업공사’로 바꿔 상공부가 관리했다가 1953년 국영기업으로 정식 설립했다. 70주년은 대한중공업공사 시절부터 시작됐다.
1956년에는 국내 최초 제강공장인 평로공장을 세웠고, 1960년 4월 1일에는 박판압연공장을 세워 자력을 철판을 생산했다. 1962년에 인천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한 뒤 1966년에 정부 지분 중 52.5%가 민간에 팔려 민영화 됐다.
후자는 1964년에 이동준이 서독 차관을 들여 세운 ‘인천제철’이다. 하지만 인천제철은 기술 문제로 인해 경영난을 겪었고, 산업은행 관리체제로 넘어갔다. 인천제철은 우량기업으로 꼽히던 인천중공업에 합병되었고, 통합 법인의 사명은 ‘인천제철’로 정했다. 1975년에 인천 합금철을 계열사로 설립했다.
통합 법인이 출범했으나 경영난은 개선되지 않았고, 정부는 공기업이었던 인천제철을 민간 기업에 매각하기로 했다. 철강 사업을 하고 있거나 진출하려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참여했는데, 당시에도 단일기업으로 가장 많은 철강재를 소비했던 현대그룹은 정주영 창업 회장이 주도했고, 동국제강도 사업 확장을 위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양사가 공동으로 인수하자고 합의했으나 막판에 현대그룹이 단독으로 응찰, 1978년 인수에 성공했다. 1년 전 정부는 포스코 포항제철소에 이은 두 번째 고로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을 착수했는데, 현대그룹은 인천제철 인수 직후 기존 현대강관(현대하이스코의 전신. 2015년 현대제철에 흡수합병됨)과 인천제철을 기반으로 연산 10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발표하며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1984년 제2 제철 입지로 전남 광양이 확정됐고 포스코가 사업권을 따냈다. 첫 번째 시련이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물러서지 않았다. 1985년 인천제철은 인천합금철을 합병했고, 1987년 기업 공개를 통해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8년에 스테인레스공장을 세운 후 1992년 국제철강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서울지점도 개설했다.
첫 번째 시련 후 10년 만인 1994년, 정주영 창업 회장은 제3 제철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산 가덕도에 짓겠다며 부지까지 명시했다. 하지만 이 시도도 무산됐다.
1996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취임사에서 제철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했다. 선언은 즉각 실천에 옮겨져 종합제철사업 프로젝트팀이 발족됐다. 프로젝트팀은 그룹 종합기획실 임직원을 비롯해 현대제철, 현대건설 등 관련 계열사 40여명의 핵심 직원들로 구성됐다. 기본 구상은 연산 1000만t 규모의 고로 방식 일관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고 8조원가량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입지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경남 하동의 갈사 간척지로 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듬해 말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 정몽구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을 보류하기로 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 출범했던 모든 팀도 해체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현대그룹은 계열 분리됐고,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와 기아를 주축으로 2000년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제철과 현대강관 등 철강 계열사를 받아들였다.
이후 인천제철은 부실화되거나 일시적인 경영난을 겪은 중소철강사들을 공격적으로 M&A 했다. 2000년 3월에는 국내 주요 압연형강 생산업체인 강원산업을 합병해 형강 업계의 독보적인 1인자로 군림했다.
2001년 7월부터 사명을 ‘INI스틸’로 사명을 바꾸고 12월에는 삼미특수강(현 현대비앤지스틸)을 인수했다.
창업 회장에서부터 시작된 정몽구 명예회장의 네 번째 일관제철소 사업의 꿈은 2004년 실현됐다. IMF 외환위기로 그룹이 해체된 한보철강공업 당진제철소를 현대하이스코와 공동으로 참여해 포스코‧동국제강 컨소시엄 등 경쟁사를 제치고 2004년 10월 인수에 성공했다. 한보철강 인수로 INI스틸은 국내 3~4위 업체와 격차를 벌리며 포스코에 이어 확고한 2위 철강기업이 됐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2005년 3월 대표이사로 취임해 고로 건설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했다. 2006년 1월 충청남도로부터 당진에 일관제철소 건설 승인을 받아냈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제철사업 진출을 선언한 꼭 10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그해 3월 현재의 사명으로 바꾸면서 기공식을 개최했다. 공사가 한창이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6조원이 넘게 투자한 당진제철소의 운명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정몽구 명예회장은 흔들림 없이 공사를 진행했다.
2010년 1월 5일 당진제철소 1고로를 화입해 현대제철은 32년 만에 일관제철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같은 해 4월 8일에는 이명박 대통령(당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진제철소 종합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어 11월 23일에는 2고로 화입식도 가졌다. 전 세계 철강업계를 놓고 봐도 1년 사이에 2개의 초대형 용적의 고로를 가동한 사례는 현대제철이 유일하다.
2013년 9월 13일에는 3고로 화입식을 하고 당진제철소 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면서 현대하이스코의 냉연제품 제조‧판매 부분을 인수했다. 2년여 후인 2015년 7월에는 현대하이스크롤 흡수합병에 시가총액 20조원에 철강의 상‧하공정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 철강회사로 재탄생했다.또한 동부그룹(DB그룹으로부터 동부특수강을 인수해 현대종합특수강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SPP그룹으로부터는 SPP율촌에너지 단조 부문을 인수했다.
2019년 4월 현대제철은 자동차용 철강 솔루션 브랜드 ’H-SOLUTION‘을 출시했으며, 2020년 3월에는 금속 주조 및 자유단조 사업 부문을 빼내 ’현대IFC‘를 출범시켰다.
현대제철이 지닌 강점 중 하나는 고로와 전기로를 모두 보유하고 있어 시장 흐름에 따라 생산 계획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현대차와 기아, 현대건설, 현대로템 등 그룹 계열사와 함께 범현대가인 HD현대의 조선 계열사(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 철강재 다소비 고객사가 있어 안정적인 판매를 할 수 있다.
70년을 맞은 현대제철은 창립기념일에 맞춰 100년 기업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일 현대제철 대표는 2023년 계묘년 신년사를 통해 “지난 1953년 ‘대한중공업공사’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회사의 역사는 대한민국 국가 경제의 성장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다가올 70년을 그리는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대제철이 지나온 70년의 시간 속에는 수많은 시련을 거치며 이를 경쟁력으로 축적해온 우리만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면서, “현재에도 우리 앞에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우리 모두의 지상과제인 안전에 대한 원칙과 가치를 항상 최우선의 덕목으로 염두에 두고, 앞서 제시한 회사의 방향성과 사업전략을 이정표 삼아 새롭게 펼쳐질 70년 역사의 밑그림을 그려 나가자”고 당부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