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최근 전반적인 반도체 사업 역량을 확대·강화하고 있는 인텔이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 우수한 ‘가격 대비 성능(가성비)’과 훨씬 빠른 납기를 내세워 AI 칩에 굶주린 기업들의 수요를 맞추고, 미미한 시장 점유율을 의미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주문 후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엔비디아 AI칩
최근 엔비디아는 AI칩 수요 폭증에 대응해 자사의 차세대 AI칩 H100의 출하량을 내년까지 150만~200만 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올해 목표 출하량 50만 개의 3~4배에 달하는 양이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장담한 물량을 제때 공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엔비디아 AI칩의 공급은 전적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TSMC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TSMC도 최근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최신 AI칩 제조에 필요한 첨단 ‘패키징(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하나의 칩으로 통합하는 공정)’ 라인을 신설하고 있다. 다만, 신규 공장의 본격적인 가동과 생산까지는 최소 1년 이상 걸릴 전망이어서 엔비디아가 요청해도 바로 공급량을 늘릴 수 없다.
게다가 엔비디아의 AI칩은 내년인 2024년 물량까지 이미 선주문이 거의 완료된 상태라서 신규 및 추가 고객 확보도 쉽지 않다.
인텔은 자사의 AI칩 ‘가우디2’를 내세워 AI 반도체 시장을 공략한다. 가우디2는 인텔이 2019년 20억 달러(약 2조6000억원)에 인수한 이스라엘 스타트업 하바나랩스가 개발한 AI칩이다. 최근 AI 성능을 측정하는 ‘MLPerf 추론 3.1’ 테스트에서 H100에 비해 약 9% 정도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A100 칩보다는 2.4배 이상의 성능을 보였다.
양사 제품 모두 고정 판매 가격이 없어 직접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인텔은 가우디2가 엔비디아의 H100보다 가격 대비 성능이 3배 이상 좋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우디2가 H100의 약 90% 성능을 제공하면서 가격은 약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적은 비용으로 H100을 대신할 AI칩을 찾는 기업 입장에서 솔깃한 제안이다.
빠르고 안정적인 공급도 가우디2의 장점
짧은 리드타임(주문 후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도 가우디2의 장점이다. 가우디2 제조에 사용되는 TSMC의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은 현재 H100의 4나노 공정보다 생산 여력이 충분해 공급도 원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성형 AI의 필수 요소인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개발과 학습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AI 사업에 사활을 건 기업 입장에서는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엔비디아 칩이나 비싼 클라우드 AI 서비스를 빌려 쓰는 것보다 당장 구할 수 있는 인텔 칩을 사용해 LLM을 학습시키는 것이 시장에서 뒤처지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가우디2는 이미 시장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 2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대만 디지타임스는 중국에서 지난 7월 출시한 인텔의 가우디2 판매가 급증하자 인텔이 TSMC에 7나노미터 칩 주문을 늘렸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글로벌 AI 반도체 매출의 20~30%를 차지하는 거대하고 중요한 시장이다. 그런데 엔비디아의 H100, A100 칩과 AMD의 MI300은 미국 정부의 대중 반도체 제재로 중국 수출이 막힌 상태다.
아직 중국 수출이 막히지 않았으면서, 3분의 1 가격에 성능은 H100에 버금가는 가우디2가 중국에서 H100 및 A100의 대안으로 빠르게 자리 잡는 모양새다. 다만 인텔은 중국 시장에서 구체적인 가우디2의 판매량은 밝히지 않았다.
산드라 리베라 인텔 데이터센터&AI 그룹 수석부사장은 20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이노베이션 2023’ 행사에서 “가우디 2가 엔비디아 A100보다 2.4배 빠르고 가성비는 H100보다 3배 이상 좋다”며 “AI 솔루션 구축을 원하는 고객들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AI 반도체 시장에 진출하는 인텔
엔비디아 AI칩이 시장을 선점하고 독자적인 생태계를 형성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생소한 인텔의 AI칩으로 갈아타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인텔 역시 당장 시장을 뒤집겠다는 게 아니라 가우디2로 AI 반도체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후속 제품으로 승부를 본다는 계획이다.
2025년 출시할 예정인 인텔의 ‘팔콘 쇼어’는 288기가바이트 용량의 HBM3 메모리를 탑재하는 고성능 AI칩이다. 가우디2가 엔비디아의 A100에 대응하는 제품이라면 팔콘 쇼어야말로 H100 또는 그 후속 제품에 대응하는 제품이다.
나아가 인텔은 좀 더 장기적으로 AI 반도체 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엔비디아의 AI칩이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범용 AI칩인 것과 달리, 인텔의 가우디2는 처음부터 AI 목적에 맞춰 설계한 주문형 반도체(ASIC)다. 엔비디아의 AI칩에 버금가는 성능에 가격은 훨씬 저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다수의 기업들이 광범위한 AI 워크로드, 특히 생성형 AI 기반 워크로드에 대한 맞춤형 AI칩을 대거 배포하면서 현재 활용되는 GPU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단기적으로는 범용성을 갖춘 GPU 기반 AI칩이 대세를 유지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기업들이 훨씬 유연하고 비용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하면서 가우디2와 같은 맞춤형 설계 AI칩의 사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가트너는 설명했다.
한편, 가트너는 AI 반도체 매출이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올해는 전년 대비 20.9% 증가한 534억 달러(약 71조3600억원) 규모를 기록할 것이며, 오는 2027년까지 1194억 달러(약 159조5700억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용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pc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