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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선대회장의 ‘삼성 신경영’ “마누라 빼라고 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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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선대회장의 ‘삼성 신경영’ “마누라 빼라고 한 이유는?”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 혁신의 시작
“13년간 정리정돈 안돼…”日 전문가가 남긴 ‘K보고서’
아주 작은 악습의 개선을 이뤄내야 거대한 변화 가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사진=삼성전자이미지 확대보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지난 6월 7일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하 신경영)을 한지 31년째 되는 날이었다.

‘신경영’은 초일류‧초격차를 추구하는 삼성의 혁신을 대변하는 정신적인 유산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신경영의 출발점은 아주 사소한 습관을 개선해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지적에서 시작됐다.
삼성전관(현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 및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등을 역임하며 삼성 혁신의 중심에서 활약한 손욱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초빙교수가 2013년 발간한 ‘삼성, 집요한 혁신의 역사’에 신경영 탄생 비화가 언급돼어 있다. 원문을 소개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1993년 6월 7일. 기업인으로서의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경영 선언’이 공표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 출장을 마친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수핸팀장이 바로 나였다.

새로 임명된 비서실 팀장이 회장의 해외 순방 팀장을 맡아 수행하는 게 삼성의 관행이다. 국내에선 회장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바쁜 일과 중에는 힘들지만 여행 중에는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기에 생신 관행이었다. 마침 그해 초부터 비서실에서 일했던 내가 수행팀장 역할을 맡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하기 전날 일본의 전문가들과 새벽가지 토론을 이어갔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는데 비행시간 직전까지 일본 관계자들과 골프도 했다 거의 30시간 이상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수행원들은 ‘틀림없이 기행기에서 주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수행팀장은 행운이다’라는 야기까지 나왔다. 편하게 자면서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상은 비행기에 오르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이 회장은 문서 하나를 주면서 “읽어 보고 왜 그런지 대책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K보고서’다. K는 1993년까지 13년간 삼성전자에서 고문으로 일해 온 일본인이다. 그는 오디오 사업 부문에서 설계 기술을 가르쳤다.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일본인들은 연구‧개발자들이 부품이나 측정기,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나면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다시 황용한다. 중복이나 누락 없이 원활한 연구‧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그런데 삼성은 13년 동안 정리정돈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금까지 안 된다. 내가 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 이제 회장이 조직 문화를 바꿀 때다.” 이 회장은 이 보고서를 건네먀 왜 안 되는지 원인과 대책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수행원은 모두 6명이었다. 결국 비행기 안에서 토론이 시작됐다. 책임의식‧주인의식‧룰(규칙‧제도)‧처벌 등이 없어서 그렇다는 등 많은 논의와 답이 나왔다. 한두 시간 만에 다을 내어 보여 드렸는데 이 회장은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답을 드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다시”였다. 독일에 도착해 주재원을 방문하고 저녁을 먹고 또 토론이 이어졌다. 끝장을 내자는 심산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보고를 해도 “아니다”라는 답만 들어야 했다.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잉 이어졌으니 이 회장이 얼마나 잠을 자지 않고 있는지ㅣ 감도 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 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그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답을 주며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신경영’의 시작이었다.

‘어무리 정리정돈을 강조해도 13년간 지켜지지 않는다’는 K보고서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의 ‘다시’ 끝에 듣게 된 답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니…도저히 ‘정리정돈’과 ‘자기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처음sp는 무슨 뜻인지 모를뿐더러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 가자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 갔다. 내가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건 결국 자기한테 큰 도움이 돼 돌아오기 마련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 결국 이 회장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근원적 얘기를 했던 것이다.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조, 사무 현장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일류가 될 수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 회장이 자주하는 표현 가운데 “손가락을 보디 말고 달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고객 사랑, 인류 사랑이라는 달을 봐야 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사례로 지적하면 그것을 개선한다고 껍데기만 보니 본질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3년 6월 7일 나온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핵심은 ‘양보다 질’이었다. “지금까지는 양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 양 100%를 벗어나 질 100%로 가자.” 질이라는 건 고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삼성)을 위한 사랑이었다. “암무리 그래도 제조하는 사람들은 양을 제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양 50%, 질 50%로 하시지요.” 이

이런 건의를 올려 봤자 이 회장은 확고부동했다. 오로지 ‘질 100%.’ 이것이 프랑크푸르크 선언으로 시작된 신경영의 요체다.

<삼성, 집요한 혁신의 역사 中. P145~149>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이 선대회장이 지목한 13년간 개선되지 않는 정리정돈은 삼성이 뿌리채 뽑아야 할 악습의 사례였다. 눈을 찌푸리면서도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악습을 반복하는 게 문제다. 이후 지적받은 다양한 악습을 뽑아 내야 하는 일이 신경영의 성공을 결정하는 열쇠로 작용했다.

이러한 신경영을 대하는 삼성맨들의 태도로 이 선대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야 한다”는 말로 정의했다. 가족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으로 일류로 바꾸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렇다면 이 선대회장은 바꿔야 할 대상에 마누라를 제외했는지가 궁금하다.

이에 대한 답은 의외의 책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승현 인팩ㅋ코리아 대표는 삼성전자에 재직하던 1990년대에 일본 도쿄에 설립된 삼성전자의 신규사업팀을 맡아 온라인 전자상거래 제도를 도입하고, 당시 여러 표준이 경쟁하던 차세대 TV 시장에서 액정화면(LCD) TV 영업을 맡아 소니를 제치고 삼성전자가 TV시장 세계 1위 등극에 최전선에서 기여한 장본인이다.

그가 올해 펴낸 ‘‘최강 소니TV’ 꺾은 집념의 셀러리맨’에는 신경영과 관련한 이 선대회장과의 대화 기록이 담겨 있다. 다음은 책에 수록된 원문 내용이다.

오늘날의 삼성이 되기까지 이건희 회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일본 주재원으로 있을 때였다. 한 번은 이건희 회장이 오셨는데 굉장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삼성이 일본에 진출한 지 50년이 다 되고 있는데도 아키하바라에 가면 삼성 제품이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용산 전자상가와 같은 아키하바라에서 삼성 제품이 거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한 2시간 계시다가 떠나셨다. 떠날 때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사진을 찍자고 하셔서 사진도 함께 찍었다.

내가 오사카에 근무할 때인 1993년,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대대적인 혁신을 요구하는 ‘신경영’을 선언했다. 그는 삼성의 중역들이 양적 성장과 한국 1위 기업에만 만족하고 있다면서 위기의식을 가져야ㅑ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 유명한 선언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가 발표되던 순간이었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된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꿔야 한다.”

전면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방침이었다. 일본을 잘 아는 이건희 회장은 뼈를 깎는 변화만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회장님, 왜 마누라는 빼라고 하셨습니까?”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그래서 마누라하고 자식은 놔두고 나머지는 다 바꾸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최강 소니 TV’ 잡은 집념의 셀러리맨 中. 이승현, P45~46>

마누라는 제외한 이유도 매우 단순했다. 혁신은 중요하지만, 가족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이야 이혼율이 너무 높아 마누라를 바꾸는 행위가 개인의 결격사유가 되는 일은 없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가족을 지키는 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큰 덕목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삼성의 신경영이 불을 지핀 ‘질(質) 경영’이 30여 년 만에 재계의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리밸런싱(구조개편)을 추진중인 SK그룹이 질 위주의 사업을 추구하겠다고 했고, 장인화 회장이 취임한 포스코그룹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할 것임을 밝히며 사업 구조의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 신경영이 일으킨 질 경영의 가치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라면서, “작은 것에서 시작해 초일류로 향하는 신경영의 정신을 적용해 대한민국 재계와 산업이 고도화하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