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한 각종 산업정책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면서 한국 기업의 사업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측은 기업들이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기로 바이든 행정부와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지급을 장담할 수 없고, 외국 기업의 미국 현지 생산을 압박하기 위해 관세를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모습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산업·무역 정책을 총괄할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지명자는 29일(현지시간)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기로 미국 정부와 확정한 계약을 이행(honor)하겠냐는 질문에 "말할 수 없다. 내가 읽지 않은 무엇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답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의 철강, 한국의 가전 같은 경우 그들은 우리를 그저 이용했다"며 "이제는 그들이 우리와 협력해 그 생산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올 때다. 그래서 난 우리가 우리 동맹들이 미국 내 제조업 생산성을 늘리도록 그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가 시행되면 미국에 대규모 설비투자를 추진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법에 따라 받게 돼 있는 보조금 등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이미 지급이 결정된 수천억∼수조원 규모의 보조금이 줄면 공장 착공 및 생산 지연 등 기존에 세워둔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우려하는 만큼의 큰 타격은 아닐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바라보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보조금이 줄어들면 공장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는 TSMC 등 다른 국가의 기업도 마찬가지고, 모든 기업의 생산이 지연되면 미국 입장에서도 손해"라고 바라봤다.
안 전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의 공장 부지는 국내에도 있다"며 "국내 공장에서 생산을 이어가면 되기 때문에 당장 큰 피해를 우려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면 기대했던 비용 절감 효과가 사라질 수 있다"며 "향후 투자 규모 조정 등에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기업 차원에서 대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고, 산업부, 외교부 등 정부 차원에서 보조금 지급에 대한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등 대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기 위해 370억 달러 이상의 최종 투자 규모를 결정하고, 작년 12월 20일 미국 상무부와 47억4천500만 달러(약 6조9천억원)의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계약을 최종 체결했다.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SK하이닉스도 지난달 19일 미 상무부로부터 최대 4억5천800만 달러(약 6천639억원)의 직접 보조금 지급이 결정됐다.
업계에서는 이미 기업들이 전임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거나 트럼프 정부에서도 문제없이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서는 설사 보조금이 일시 집행 중단되더라도 한국의 대미 설비투자 및 고용 창출과 연계된 보조금 등은 해당 투자 지역을 지역구로 둔 여야 의원들의 입김으로 인해 복원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관측도 나온다.
이와 함께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1기처럼 관세로 협박하며 대미 투자를 종용하는 행태가 반복될 전망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18년 한국산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고율 관세를 적용했고,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세이프가드 결정 전부터 검토해온 미국 현지 공장 가동을 서두르는 결과를 낳았다.
LG전자는 현재 세탁기와 건조기를 생산하는 미국 테네시 공장에서 냉장고와 TV 등도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창태 LG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은 지난 23일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아직 트럼프 행정부의 구체적인 관세 정책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고율관세가 부과된 제품은 여러 생산지에서 생산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고, 유통업체와도 협력해 리스크를 최소화할 것"이라며 "만일 관세 인상 수준이 본질적인 공급망 변화를 해야 하면 생산시설 이전 및 기존 캐파(생산능력) 조절 등 적극적인 생산지 변화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대로 멕시코에 25%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대미 수출의 전초 기지를 찾아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도 비상이 걸린다.
현재 멕시코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가전과 TV 등의 공장을, 기아가 자동차 공장을 운영한다. 현대모비스와 현대트랜시스도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다.
이와 관련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재집권으로 예상했던 시나리오"라며 "관세 부과는 기본적으로 기업이 아닌 교역국에 대한 압박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한 대로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성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0328syu@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