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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은목서 금목서 꽃향기에 매혹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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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은목서 금목서 꽃향기에 매혹되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한해가 저물고 있다. 마지막 잎새처럼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니 벌써’ 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든 추위 탓에 몸도 마음도 움츠려드는지 외롭다는 생각이 들며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까닭 없이 외로워지는 저녁이면 그리운 얼굴들이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스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외로움이란 향기로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훈기가 도는 향기로운 사람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소치 허련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쓴 진도의 소설가 고 곽의진 선생이다.

일찍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했다. 나 역시 전국으로 문학기행 답사를 다니며 세상 도처에 숨은 인생의 고수들과 종종 대면하는 행운을 누렸다. 곽의진 작가도 내가 만난 인생의 고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가을 전라남도 진도로 문학기행 답사를 떠날 때만 해도 나는 곽의진 소설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과문한 탓에 진도에 도착한 뒤에야 지인의 소개로 비로소 소설가 곽의진 선생을 알게 되었다.
곽의진 선생은 생면부지의 낯선 방문객을 향기로운 차로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자신의 소설책에 직접 싸인을 하여 선물로 건넸다. 뿐만 아니라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근사한 점심식사까지 대접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를 만나러 가던 길에 남도국립국악원을 먼저 들렀을 때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었을 때 달큰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훅 하고 코끝을 스쳤다. 농익은 여인의 체취 같은 매혹적인 향기에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어렵지 않게 자잘한 흰 꽃송이를 가득 달고 선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르른 잎사귀 사이로 가지마다 빼곡히 들어찬 순백의 꽃송이들이 맑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나무가 다름 아닌 향기가 천리나 간다는 은목서였다.
은목서는 중국 원산의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이다.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으로 잎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거나 밋밋하다. 대부분의 상록관목들이 그렇듯이 잎은 두껍고 질긴 편이다. 꽃들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10월경에 잎겨드랑이에 황백색의 꽃들이 모여 피며 은은하면서도 맑은 향기가 좋아 남녘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 나무 중 하나다. 목서(木犀)란 물푸레나무의 한자식 표기인데 은목서는 꽃이 은색이어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은목서와 비슷하지만 등황색 꽃을 피우는 나무로 금목서가 있다. 금목서는 만리향이라 불리울만큼 향기가 짙고 그윽해서 가을 꽃향기 중에 으뜸이라 할 만하다. 나무의 수형도 아름답고 꽃이 피면 그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흐뭇해지는 탓에 최고의 정원수로 꼽기도 하지만 내한성이 약해 겨울 추위가 매운 중부지방에선 욕심을 내선 안 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금목서나 은목서를 만나려면 송광사나 선암사 같은 남도의 절집이나 수백 년 된 고가를 찾아가야 하는 귀한 꽃나무 중의 하나다.

이른 봄날 춘설 속에 피어나 맑은 향기를 흘리는 매화의 향기도 좋고, 소나기 자주 퍼붓는 여름날 연꽃방죽의 은은한 연꽃향기도 좋지만 깊어가는 가을 산사의 경내를 향기롭게 하는 은목서 금목서의 향기는 단풍에 눈길 주기 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을날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 속담에 ‘좋은 술은 골목이 깊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골목이 아무리 깊어도 좋은 술의 향기가 멀리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단 술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은목서, 금목서의 향기도 짙고 그윽하여 꽃보다는 향기로 먼저 찾게 되는 꽃나무 중의 하나다. 사람의 향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금목서 은목서는 꽃을 보는 일이 눈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향기로워지는 일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은목서 향기를 흠향할 때마다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내 마음의 안섶을 향기로 채우고 싶어진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