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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꽃의 기다림엔 유통기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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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꽃의 기다림엔 유통기한이 없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한 여름의 연꽃방죽을 환하게 밝히는 연꽃은 흔히 꽃 중에 군자로 불리는 꽃이다. “진흙에서 나왔음에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고 밖은 곧으며, 덩굴을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않으며, 향은 멀리 갈수록 더욱 맑고, 꽃대는 꼿꼿하고 고결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은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이 같이 고백했다. 연꽃이 지닌 미덕은 이외에도 많지만 무엇보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은 연꽃 씨앗의 기나긴 생명력이다.

2009년 5월 8일 옛 가야의 땅이었던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발굴 현장에서 포크레인 작업 중 연꽃씨앗이 발견되었다. 3알을 수습한 것을 시작으로 몇 개의 연꽃씨앗을 더 수습하여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을 해보니 무려 700년 전, 고려시대의 씨앗으로 확인되었다. 과연 싹이 틀 수 있을까?
함안군은 여러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발아를 시도한 결과 8개의 씨앗 중 3 개의 씨앗을 발아시켜 2010년 7월 아름답고 탐스런 연꽃을 피우는 데 성공하였다. 사람들은 옛 아라가야의 땅에서 태어난 붉은 연꽃이라 해서 ‘아라홍련’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무려 700년의 시간을 거슬러 피어난 이 연꽃은 고려 시대 탱화에서 보이는 연꽃의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꽃을 피운 세 그루의 아라홍련은 서너 해 만에 무더기로 불어나 이젠 여름이면 함안박물관 연못을 등불처럼 환하게 밝히는 연꽃단지를 이루어 함안군의 자랑이 되었다. 이보다 오랜 기록으로는 1953년 일본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2000여 년 전 연꽃 씨앗 3개가 당시 카누에서 발굴됐는데, 이 씨앗 역시 3개 중 2개가 보란 듯이 싹을 틔운 적이 있다.

이처럼 많은 식물들의 씨앗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씨앗이야말로 자신들의 미래인 까닭이다. 나와 같이 꽃의 아름다움이나 탐하는 사람들은 씨앗에 별 관심이 없지만 씨앗은 식물이 3억여년 전 만든 혁신적 번식 전략의 산물이자 어디서든 살아 남을 수 있는 생존배낭이다. 이처럼 식물들은 씨앗 속에 어떤 상황에서도 잘 자랄 수 있도록 온갖 방법과 장치들을 정성으로 마련해 두었기 떄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꽃이 식물의 절정기라고 생각하지만 꽃은 보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열매(씨앗)야말로 성실하게 살아온 식물들만이 받을 수 있는 생애 가장 빛나는 훈장인 셈이다.
연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식물들의 씨앗은 발아가 정지된 휴면기를 거친다. 씨앗의 휴면기는 식물의 종에 따라 다양한데 콩과식물이나 수련 등은 비교적 수면기간이 긴 편에 속한다.

식물들의 씨앗이 휴면기를 갖는 것은 안정적으로 다음 세대로 건너가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휴면기에 들어간 씨앗들은 온도나 빛, 수분 등 외부의 환경 조건이 발아에 알맞게 충족될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아라홍련처럼 수백수천 년의 기간도 너끈히 참아낸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싹 틔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진 기회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디어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싹을 틔운다.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휴면능력 덕분에 식물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캄캄한 어둠의 시간을 견디고 우리 앞에 화사하게 피어난 아라연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생의 신비요, 자연의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다. 급격한 과학의 발달로 속도에 민감해진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조급증에 시달리고 기다림에 인색하다. 너나 할 것 없이 빠름! 빠름! 빠름! 하는 통신사 광고처럼 속도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는 인디언처럼 화려한 꽃의 시간을 꿈꾸며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아라홍련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지혜를 일깨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