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으면서 연두에서 초록으로 바뀌어가는 신록이 점점 초록기운을 더해간다. 옛 시인의 녹비홍수(錄肥紅瘦)란 말이 실감나는 시기다. 어느덧 초록은 살찌고 꽃빛은 야윈다는 봄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이다. 꽃들이 사라진 자리를 촘촘히 메우며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신록이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때도 요즈음이다. 하지만 산빛이 아무리 초록으로 짙어진다고 해도 꽃들이 모두 사리진 것은 아니다. 새로 돋은 잎들이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하면 흰색의 꽃들이 피어나 숲을 수놓기 시작한다. 여름에 피는 꽃 중엔 흰색의 꽃이 많은데 그것은 흰색이 초록에 묻히지 않고 눈에 잘 띄어 꽃의 수분을 도와주는 곤충을 불러 모으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꽃 중에 하나가 조팝나무 꽃이다.
볕이 잘 드는 곳이면 논둑이나 산밭머리, 언덕을 가리지 않고 눈부신 흰색의 꽃을 피우는 조팝나무는 우리에게 친근한 꽃나무다. 장미과에 속하는 조팝나무는 나무들이 새 잎을 내어달기 시작할 무렵 잎보다 먼저 순백의 꽃송이를 가지마다 가득 내어단다. 조팝나무란 이름은 그 꽃이 좁쌀을 튀겨놓은 듯해 조밥나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강하게 발음하다 보니 조팝나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방에서는 조팝나무의 뿌리를 약재로 쓰고, 민간에서는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무쳐먹기도 했고, 꽃에 꿀이 많아 밀원식물로도 각광을 받는 꽃나무이기도 하다.
조팝나무와 함께 흰빛으로 거리 곳곳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꽃이 이팝나무 꽃이다. 이팝나무는 멀리서 보면 흰 구름이 내려앉은 듯, 때 아닌 눈이 내린 듯 나무 한가득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해준다. 그 하얀 꽃송이가 밥사발에 소복한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 했는데 이밥이 이팝으로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쌀밥을 두고 이밥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씨 조선 500년 동안 귀한 쌀밥은 왕족이나 양반인 이씨들이 먹는 밥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로는 이 꽃이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 무렵에 피어서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렀는데 입하가 연음화 현상으로,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이팝나무는 낙엽 지는 큰 키 나무다. 따뜻한 남쪽이 고향이지만 요즘은 중부지방에서도 잘 자라므로 가로수로 많이 심기도 한다. 옛날엔 못자리가 한참일 무렵 피어나는 이팝나무 꽃을 보고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가늠하는 농사의 지표목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밥과 연관된 이름을 가진 꽃이라 해서 흰 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공원이나 주택가를 지나다 보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꽃나무가 있다. 진분홍의 꽃빛이 워낙 고운 데다가 잎도 없는 가지에 다닥다닥 꽃송이를 달고 있는 모습이 독특한 박태기나무다. 중국이 고향인 박태기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 지는 작은키나무로 꽃자루도 없는 꽃들이 다닥다닥 한 무더기씩 뭉쳐서 피는데 자세히 보면 보통 20개 이상의 꽃들이 달려 있다.
처음 이 나무를 알았을 때 그 이름이 독특하여 찾아보았던 적이 있는데 학술적 기록은 찾기 어렵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밥알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인 밥테기에서 비롯되어 박태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혹은 줄기에 붙은 꽃송이들이 마치 밥알 같기도 하고, 쌀을 튀긴 모습 같아 밥튀기에서 되었다고도 한다. 꽃분홍과 자주색의 경계에 있는 신비로운 붉은 색을 지닌 어여쁜 박태기꽃을 보고 밥을 떠올린 옛사람들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같은 꽃이라도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끄 꽃을 바라보는 느낌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팝나무꽃이나 풍성한 이팝나무꽃, 그리고 어여쁜 박태기나무꽃을 보고 밥을 떠올린 사람들이 살던 시대는 필경 배고픈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꽃들의 이름이 지닌 슬픈 내력을 짚어보며 밥 한 공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