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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사랑한다면 자귀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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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사랑한다면 자귀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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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마침내 9월이다. 폭염과 폭우로 점철된 지난 여름은 유난히 힘겹고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지났건만 폭염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라 햇볕 아래 서는 게 아직도 두렵기만 하다. 사상 초유의 가마솥 더위를 견디며 나는 종종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읽었던 ‘여름징역’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여름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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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이렇게 가까운 사람마저도 미워하게 만드는 혹독한 여름의 태양 아래서도 화사한 꽃을 피운 나무가 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서 새벽녘에 천변에 나가 자전거를 달리다 보면 새의 솜털 같은 분홍 꽃송이를 내어단 나무가 눈에 띄곤 한다. 사랑나무로 일컬어지는 자귀나무다. 꽃을 알면 알수록 경이롭기 그지없는 것이 자연의 신비란 걸 새삼 느끼곤 한다. 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어찌 수련이 물속에 피는 꽃이 아니라 잠자는 꽃이란 걸 알 수 있었으며 미모사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시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으랴.

자귀나무는 산자락이나 밭둑, 마을 어귀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의 토종나무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도심의 공원이나 빌딩 숲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뜨거운 여름날 화사한 꽃을 피워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미모사과에 속하는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어김없이 양쪽으로 마주난 잎을 서로 포개고 잠을 잔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움츠러드는 미모사처럼 수면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잠이 드는 미모사와는 달리 자귀나무는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잎을 맞대고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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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자귀나무가 잎을 포개는 까닭은 폭풍우 같은 혹독한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광합성을 하지 않는 밤에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와 수분 증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히나 자귀나무는 아까시나무가 끝에 홀로 된 잎을 달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주난 이파리가 짝이 맞는다. 그런 연유로 자귀나무는 합환목·합혼수 같은 별칭으로 불리며 예로부터 신혼부부의 창가에 이 나무를 심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 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자귀나무 꽃을 따다 말려서 베게 속에 넣어두면 편히 잠들 수 있다고도 하는데 꽃향기를 베고 누운 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향기로울 것만 같다.

자귀나무는 무엇보다 꽃이 인상적이다. 한바탕 소나기 퍼붓고 간 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의 우듬지에 부채춤을 추듯 무리를 이루어 핀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색실처럼 늘어진 것은 수꽃의 수술이다. 이 수많은 수술은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꽃 모양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분홍 색실을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새의 깃텃 같기도 한 수꽃이 고운 자태를 뽐내는 사이로 암꽃들이 봉곳한 꽃망울을 맺은 것을 볼 수 있다. 가을이 오고 선득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콩꼬투리 닮은 열매가 익어간다. 바람이라도 불면 마른 꼬투리가 서로 부딪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여인의 수다처럼 끊이지 않아 ‘여설목(女舌木)’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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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세상의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피어난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나는 꽃은 보다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 가을의 문턱이다. 꽃을 찾아 사방으로 눈길을 놓던 시절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이제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을 살필 때가 되었다. 힘겹게 한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느라 낙과가 많았던 삶이라 해도 거둘 수 있는 열매가 얼마나 되는지 찬찬히 헤아려 볼 때가 된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