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과에 속하는 무화과나무는 소아시아 원산의 갈잎 넓은 잎떨기 나무다. 그 종류가 무려 750여 종이나 되고, 약 4000년 전에 이집트에서 재배한 기록이 있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과수로 꼽힌다. 조선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꽃이 피지 않고도 열매를 맺는 이상한 나무를 보았다"고 무화과를 처음 본 소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꽃이 피어야 열매가 맺히는 게 세상 이치인데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무화과(無花果)라니! 연암이 무화과를 보고 '이상한 나무'라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중국의 <화경(花鏡)>에서는 무화과의 좋은 점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첫째는 열매가 달고 맛있어 노인과 어린이가 먹어 좋고, 둘째는 말리면 곶감 같아 두고 시시로 먹을 수 있으며, 셋째는 입추 상강에 이르도록 차례로 익으니 석 달을 먹을 수 있고, 넷째는 복숭아나 자두는 3~4년 후에 열매 맺지만 무화과는 가지를 꽂으면 당해에도 열매를 맺으며, 다섯째는 잎은 치질을 치료하는 묘약이고, 여섯째는 상강 후의 익지 않은 열매는 탕밀로 졸여 먹을 수 있으며, 일곱째는 흙에 꽂으면 살 수 있다. 이처럼 무화과는 예사 과일이 아니다.
무화과는 사과나무나 배나무처럼 우리에게 꽃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꽃을 보여주지 않을 뿐, 무화과도 엄연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무화과 꽃의 비밀은 우리가 맛있게 먹는 무화과 열매에 있다. 이 '열매'라고 부르는 무화과가 실은 과실이 아니라 꽃이다. 그것도 그냥 꽃이 아니라 속에 무수한 꽃이 있고, 꽃머리는 아직 열리지 않은 화낭(花囊)이라는 꽃 주머니 형태의 독특한 구조다. 쉽게 말해 무화과의 껍질은 꽃받침이고, 붉은 속이 꽃인 셈이다. 영어로 무화과(fig)의 어원은 '가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꽃을 피우는 무화과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무화과의 비밀은 또 있다. 과일 안에 꽃이 숨겨져 있다 보니 무화과는 여느 꽃들처럼 곤충의 도움을 받아 수정을 할 수가 없다. 한데 무화과에겐 다행히도 수정을 도와주는 무화과말벌이란 전담 도우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무화과말벌은 무화과 밖에서는 번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화과 속에서 살며 무화과의 수정을 전담하며 공생한다고 한다. 식물을 통해 탁월하게 세상을 해석해낸 에세이 '랩걸'의 저자인 미국의 식물학자 호프 자런은 자신의 책을 통해 말벌과 무화과의 이 독특한 공생 관계가 거의 9000만년 동안이나 유지되며 진화해 왔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꽃은 열매를 목표로 피어난다. 꽃이 화려한 자태를 지닌 것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곤충들을 효과적으로 유인하여 보다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다. 모든 꽃이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하고 향기로울 필요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 무화과란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었지만 수천 년을 무화과말벌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해마다 탐스런 열매를 맺는 무화과야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눈에 보이는 화려함만을 좇아 바쁘게 살아왔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자신만의 꽃을 피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타인의 시선쯤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속으로 꽃 피우며 묵묵히 제몫을 다하는 무화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꽃 시절은 있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