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산책길에 잠시 건너다 본 인왕산 밑 서촌도 곳곳에 활짝 핀 벚꽃, 살구꽃이 봄 햇살을 받아 온통 환했다. 서촌은 예로부터 서울 제일의 봄 놀이터로 꼽히던 필운대가 있는 바로 그 동네다. 옛사람들은 봄나들이를 일러 상춘(賞春), 꽃구경을 상화(賞花)라 멋스럽게 칭하며 낭만적인 봄을 즐겼다.
숲해설가 공부를 시작하고 맞이하는 올봄은 각별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오고 가는 같은 봄이라도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른 느낌, 다른 빛깔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꽃의 계절인 봄에 마음 가는 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도 봄의 끝자락에서 유난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 꽃이 있다. 영산홍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구순을 넘긴 어머니와 단둘이 고향에서 지낼 때였다. 겨울끝자락에 어머니는 노환으로 몸져누우셨다. 병치레를 하느라 기력이 쇠잔해진 탓인지 이따금 어머니는 푸념하듯 꽃 피는 봄을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리시곤 했다. 더럭 겁이 났던 나는 궁리 끝에 어머니에게 봄을 선물해 드리기로 했다. 곧장 꽃집으로 가서 진분홍 꽃이 예쁘게 핀 영산홍 화분을 사서 어머니 창가에 놓아드렸다. 영산홍 덕분이었을까.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셨고 꽃 피는 봄을 함께 맞았다. 그 후로 영산홍을 볼 때마다 영산홍 화분을 보고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얼굴이 겹쳐 떠오르곤 한다.
영산홍은 진달래과에 속하는 관목으로 진달래나 철쭉과 같은 집안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가 하루가 다르게 기세를 더해가는 초록에 밀려날 즈음 빨간 물감을 듬뿍 찍은 붓끝처럼 뾰족한 꽃봉오리를 여는 영산홍은 붉고 선명한 꽃빛으로 단번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키는 기껏해야 1m를 넘지 않고 가지는 잘 갈라져 잔가지가 많고 갈색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는데 가지 끝에서는 모여 달린다. 가지 끝에 서너 송이씩 모여 피는 꽃은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지만 철쭉과 같은 통꽃으로 꽃잎 안쪽에는 보다 짙은 붉은 점이 점점이 찍혀 있다.
꽃 핀 뒤에 잎이 나는 진달래와는 달리 잎이 난 뒤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면 진달래보다는 철쭉과 더 가까운 듯 보이는 영산홍은 왜철쭉, 일본철쭉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즘 정원수로 인기 높은 영산홍은 대부분 일본에서 육종한 원예종이기 때문이다. 사쓰끼철쭉, 기리시마철쭉이 대표적인 일본 품종이다.
그렇다고 영산홍이 일본원예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영산홍은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해 온 사랑스런 꽃이다. 조선시대 화훼서인 ‘양화소록’을 쓴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아홉 품계로 나누었는데 영산홍을 3품으로 꼽았다. 1품인 솔, 대, 연, 국화, 매화, 2품인 모란 다음으로 꼽은 것만 봐도 영산홍이 꽃의 품격이나 운치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밝고 선명한 다채로운 색을 지닌 영산홍은 화분에 담아 분재로 키우기에도 좋고 정원을 꾸미거나 군식을 통해 화려한 경관을 조성하는 데도 유용한 꽃나무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꽃나무라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여행 중에 잠시 스치는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꽃을 오래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꽃과 특별한 추억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꽃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꽃이 지기 전에.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