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 주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노동자들이 요구한 미지급 법정수당 청구가 민법상의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는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 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지난 2월에도 인천 시영운수 통상임금 상고심에서 노동자들의 요구가 신의칙에 위반하지 않는다면서 항고심 판결을 깬 바 있다.
지금 법원에는 현대중공업과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 등 여러 기업의 통상임금 소송이 계류 중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들의 판결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360여 명은 지난 2012년 "단체협약에서 정한 정기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정수당을 다시 계산해 차액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에 대해 1심과 2심은 법정수당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것은 맞지만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사측의 '신의칙' 주장을 수용해 원고 일부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은 그러나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사 측의 '신의칙'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한진중공업의 연매출액이 5조~6조 원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노동자들이 요구한 법정수당은 5억원에 불과해 '신의칙' 적용이 어렵다고 판시했다.
노동자들에게 5억원을 지급하더라도 연매출액 5조~6조 원에 달하는 회사경영에 결정적 위기를 초래한다고 볼 수 없는 만큼 이미 합의한 5억 원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불 수 없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조선산업 침체 여파로 2016년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고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진중공업은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조선소 부실로 거대한 자본잠식에 빠지면서 채권단이 총 6800억 원의 채무를 출자전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주주 지분 소각과 일반 감자가 있었다.
주주들과 채권단의 고통분담으로 간신히 도산을 막아 채권단 자율 협약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렇다고 경영이 완전 정상화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재계에서는 회사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 주주들이 자기 희생을 하고 있는 마당에 노동자들만 통상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민법상 신의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간신히 연명해 나가고 있는 한진중공업이 5억 원의 임금을 추가로 지급할 경우 경영난이 더 심해져 자칫 도산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자들의 요구는 신의칙을 넘어선 것이라는 지적이다.
제계에서는 또 대법원이 명확한 신의칙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해 기업경영에 혼선을 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했다.
이번 한진중공업 재판에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가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미 2013년에 전원합의체 판결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바 있다.
대법원은 다만 '정기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더라도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 판례에 따라 이번 한진중공업 소송에서는 노동자들의 5억 원 요구가 회사경영을 위태롭게 하는냐가 쟁점이 됐다.
1·2심은 "장기적인 경영난 상태에 있는 회사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지출을 하게 됨으로써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초래된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법정수당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한진중공업 사측 주장만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근거가 없다"며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이날 또 충남지역의 한 버스회사 노동자 박 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소송 상고심에서도 추가 지급해야 할 퇴직금 3600만 원은 회사 연 매출액 40억 원의 0.9%에 불과하다며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앞서 지난 2월에도 인천 시영운수 소속 버스기사 박 모씨 등 22명이 낸 통상임금소송에서도 회사의 연간 매출액의 2∼4%에 불과한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신의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신의칙이란 신의성실의 원칙이란 말의 약어이다.
우리 민법 제2조는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이행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권리의무의 양 당사자는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신의와 성실로써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상의 대 원칙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고려하고 상대방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행동하여야 하며, 형평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사회공동생활의 구성원으로서 법률관계를 형성할 때 상대방에게 기대되는 행위 방식을 신뢰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데, 당사자 일방의 이러한 기대는 보호되어야 하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정당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이 중시된 것은 권리의 공공성과 사회성이 강조되면서부터이고 권리의 행사가 이러한 논리에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칙은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특정시키고, 정확한 의무의 내용을 확정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또한 신의칙은 권리 의무의 내용을 수정하는 기능을 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권리를 창설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신의칙은 권리를 창설하는 기능이 있다. 신의칙에 의하여 법률상 혹은 계약상 보장된 의무 뿐만 아니라 이에 부수되는 의무도 신의칙에 의해 의무로 부과되고 이에 따라 상대방은 이러한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또 신의칙은 권리를 변경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법률행위의 기초가 된 어떠한 사정 이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변경 또는 소멸된 경우에 법률행위의 효력을 유지시키는 것이 양 당사자에게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므로 이때에는 신의칙을 근거로 하여 계약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계약을 해제, 해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신의칙은 법률의 규정이 없는 경우에 적용된다.
우리 민법 제2조 제2항에서는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원칙은 신의칙의 파생원칙이다. 권리행사를 함에 있어서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되고, 여기에 위반되는 권리의 남용은 곧 신의칙 위반으로써 법이 권리행사에 효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권리의 남용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그 목적에 반하여 행사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정당한 목적이 아닌 권리행사의 경우에는 권리행사가 권리남용이 되는 것이다.
권리남용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권리의 행사가 있고, 그 권리행사로 인하여 얻는 이익과 상대방이 입는 불이익 사이에 불균형이 있어야 하고, 권리행사가 오직 상대방을 해하거나 고통을 가할 목적으로 행사하여야 한다. 즉 주관적으로 권리행사자의 의사를 고려하게 된다. 권리남용에 해당하면 권리행사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권리남용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권리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으며 행사가 제한될 뿐인 것이다.
대법원은 이번 한진중공업 소송에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소송에서 회사측이 주장하는 신의칙은 사정변경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사정변경의 원칙은 법률관계의 양 당사자가 행위할 당시의 사정이 당사자들이 예견할 수 없었던 중대한 변경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행위 당시의 행위를 요구한다면 오히려 당사자에게 부당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신의칙에 입각하여 당사자 상대방에게 행위의 내용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거나 계약을 해지 또는 해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원칙이 사정변경의 원칙이다.
당사자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준엄이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 계약을 당사자에게 강제하여 더 부당한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면 오히려 정의에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신의칙은 권리의무의 내용을 변경하거나 해지·해제하여 당사자를 계약관계의 부당한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 법원은 이러한 사정변경의 원칙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쉽게 사정변경의 원칙을 적용하여 계약관계로부터 해방시켜준다면, 당사자 합의에 의해 형성된 계약이 이 원칙에 의해 쉽게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에 의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됨으로써 사회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보아왔다. 우리 판례는 사정변경의 원칙에 입각하여 계약의 해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 다만 계속적으로 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는 계약에 있어서는 계속적 계약에서는 당사자가 예측할 수 없었던 사정이 발생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당사자에게 부당한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으므로 계약관계로부터 탈피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고 계속적 보증계약의 경우에는 사정변경의 원칙을 적용하여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왔다. 한진중공업 소송의 1심과 2심은 이같은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이 잇달아 통상임금소송의 신의칙을 인용하지 않음에 따라 앞으로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사용자측이 승소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졌다.
통상임금이란 근로자에게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소정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하여 지급하기로 정하여진 시간급ㆍ일급ㆍ주급ㆍ월급 또는 도급금액을 말한다. 즉, 1근로시간 또는 1근로일에 대하여 지급하기로 노사계약에 명시한 통상적인 임금액을 말한다. 통상임금은 해고예고수당, 시간 외ㆍ야간ㆍ휴일근로 시의 가산수당, 연차유급휴가수당, 퇴직금의 산출기초가 된다. 상여금 및 각종 수당의 경우 1988년 예규로 정한 통상임금 산정지침에 따라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후 법원이 차츰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해 오고 있다.
통상 임금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노사계약에 명시된 근로에 대한 대가로 받는 돈이고, ▲정기적 지급(정기적), ▲모든 근로자에게 일률 지급(일률성), ▲사전에 확정한 금액(고정성)이라는 요건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기본급뿐만 아니라 직책수당ㆍ기술수당ㆍ위험수당ㆍ근속수당ㆍ물가수당 등 정기적ㆍ일률적ㆍ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것은 통상임금에 산입된다. 그러나 연장ㆍ야간ㆍ휴일근로에 대한 임금, 출근자 또는 일정한 근무성적을 올린 자에게만 지급되는 성과급 등 실제 근로에 따라 변동되는 임금은 소정근로시간에 대한 임금이 아니므로 제외된다.
2013년 12월 18일 대법원은 통상임금의 조건으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제시하면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는 등 통상임금의 범위를 확대 인정하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정기 지급이 확정되어 있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하고, 특정 시점에 재직해야 받을 수 있는 휴가비ㆍ선물비 등 각종 복리후생비 등과 같이 정기적이지 않거나 근로의 대가가 아닌 경우에는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세조건(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만족하더라도 근로자가 소급 청구하는 수당이나 퇴직금 액수가 지나치게 커 회사에 경영난을 초래할 정도라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위배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예외를 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소급 청구하는 수당이나 퇴직금 액수가 지나치게 커 회사에 경영난을 초래할 정도라면 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위배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예외를 뒀지만 회사의 경영난을 초래할 정도가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판사마다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기업이 어려울 때는 5억 원의 돈이 돌지 않아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5억 원 요구가 회사경영난과는 무관하다고 단정을 지을 수 있을 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불확실하고 애매무호한 상황에서는 기업경영이 제대로 되기 어렵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판결이 재판부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경영난과 신의칙을 판단하는 기준도 좀더 명확해 져야 한다.
[필자 소개] 김대호 박사는 이코노미스트이자 경제평론가이다.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소장과 SBS CNBC 전문위원 고려대 겸임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자 시절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전경련 대한상의 무역협회 경총 백악관 국제통화기금(IMF) 미국 의회 등을 출입하면서 예리한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설로 필명을 날렸다. '발로 쓰는 경제이야기'는 지금도 레전드가 되어 있다.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TV 등에서 경제부장 금융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장 워싱턴특파원 등을 역임했다. 고려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 미국 미주리대 대학원 등에서 수학 했다, 고려대 기업경영연구소와 기술경영대학원 입학처 등에서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중국 인민대 연구위원, 미국무역협회 고문, Foreign Policy 편집위원, 한국도로공사 위험관리위원, KB금융지주 자문위원 등을 두루 거쳤다. 연합뉴스TV와 SBS CNBC 등에서 김박사의 키워드, 김대호의 경제읽기 등으로 고정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