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 인근에서 1박을 하고 개장 시간에 맞추어 아침 일찍 수목원을 찾았다. 이미 여름은 깊어 녹음은 한껏 짙어져 있었지만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네군도단풍나무 가로수는 황금빛 잎사귀를 찰랑거리며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노련한 숲해설가의 해설이 곁들여진 숲길을 걷는 동안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저마다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 함부로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행여 작은 풀꽃이라도 밟힐까 싶어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며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흰 꽃을 보았다. 꽃술이 다보록한 차꽃을 닮은 그 흰 꽃을 주워들고 무심코 고개를 젖혔을 때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나무 한 그루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신 꽃을 달고 서 있었다. 노각나무였다.
노각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중간키나무로 생육환경에 따라 10m까지도 자란다. 산목련이라 불리는 함박꽃나무의 꽃보다 조금 작은 꽃은 매우 청초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은은한 노란색이 비치는 흰색의 꽃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배롱나무나 모과나무처럼 벗겨지는 담홍색의 수피가 매우 아름다워 절로 쓰다듬고픈 충동이 일게 한다. 실제로 만져보면 실크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워 금수목, 비단 나무라 불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때 노각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나무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동일한 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각나무는 우리나라 토착 활엽수종임엔 틀림없다. 서울을 비롯하여 중부이남 지방에서 주로 자라며 모과나무나 배롱나무처럼 껍질이 잘 벗겨지는 수피는 담홍색의 얼룩무늬가 선명한 것이 세계 어느 나라 노각나무보다도 아름다워 외국에서는 가로수나 공원수로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노각나무는 공해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목질이 단단하고 가공성이 좋아 고급가구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하고, 노각나무 추출성분으로 약품이나 화장품을 만들기도 한다는 데 그냥 보기에도 아까운 꽃나무를 자르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노각나무 꽃의 꽃말은 견고, 정의이다. 최고의 목기를 만들 만큼 목질이 단단한 나무라 견고라는 꽃말은 근사하게 여겨지지만 정의라는 꽃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백처럼 통꽃으로 지는 단호함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나만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꽃말이야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니 무어라 한들 어떠랴. 어여쁜 꽃 한 송이 가슴에 품는 일이 더없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