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짙은 숲 속에 점점홍으로 피어 있는 나리꽃은 단연 여름 숲의 주인공이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적당한 키에 강렬한 주황색의 탐스럽고 커다란 꽃송이를 달고 있는 나리꽃의 자태는 단번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기 때문이다. 나리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전국의 산야에 서식하며 여름이 한창 뜨거운 7~8월에 꽃을 피운다. 나리꽃의 한자명이 백합인데 여기에서 백합은 흰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땅속의 여러 겹의 비늘줄기가 합쳐져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흰 백(白)자가 아닌 일백 백(百)자의 백합(百合)이다. 많은 사람이 백합하면 정원의 크고 향기 짙은 흰색의 백합꽃을 연상하지만 백합이 꽃의 특정한 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세상엔 다양한 색의 백합이 우리들의 꽃밭을 장식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산이나 들에서 만나는 나리꽃을 한 가지인 줄 안다. 하지만 나리꽃은 그 종류가 다양한 편이다. 그렇다고 구분이 어렵지도 않은 편이라서 조금만 신경 써서 살펴보면 쉽게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참나리다. 참나리는 나리꽃 중 가장 키가 크고 꽃도 탐스럽다. 꽃의 색과 무늬가 호랑무늬와 비슷하다고 하여 영어 이름은 ‘tiger lily’다. 참나리는 줄기에 다른 나리와 달리 줄기에 주아를 다닥다닥 달고 있어 구별이 쉽다.
여느 꽃들처럼 어여쁜 나리꽃에도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한 고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 고을의 횡포가 심한 원님의 아들이 이 처녀를 보고 강제로 희롱을 하려했다. 하지만 처녀는 원님 아들의 강제추행에 완강히 맞서다가 자결을 하여 순결을 지켰다. 그제야 원님 아들은 깊이 반성하고 후회하며 처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는데, 훗날 그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 나리꽃이란 이야기다.
꽃들에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꽃의 전설을 만든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사람이다. 야생의 나리꽃을 정원으로 옮겨 심고 향기 짙은 다양한 색의 백합으로 만든 것 또한 사람이다. 모두가 어여쁜 꽃을 보다 오래 기억하고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굳이 탓할 일은 못 된다. 지금껏 꽃을 보면서 변치 않는 생각이 꽃은 어디에 피어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정원의 백합이 더 향기롭고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야생의 나리꽃이 덜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원의 백합은 백합대로, 야생의 나리꽃은 나리꽃대로 저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시절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