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소공원을 지나는데 어린이집 담장 위로 피어난 흰 박꽃 하나가 내 눈을 찔러왔다.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몇 걸음 다가서니 넝쿨 아래로 아이 장난감처럼 작고 귀여운 조롱박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조롱박이 이만큼 자랐다면 박꽃이 피기 시작한 게 제법 된 모양인데 그동안 수없이 그 길을 오갔으면서도 왜 나는 박꽃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바쁜 일상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어 보지만 아무래도 나의 무심을 들킨 것 같아 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박꽃은 여느 꽃들처럼 화려하지 않다. 수수한 흰빛이다. 박꽃의 흰빛은 청순하기보다는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서러움의 빛깔에 가깝다. 그런데도 그 서러운 빛의 박꽃 너머로 떠오르는 내 고향의 풍경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기만 하다. 박꽃을 보면 저녁마다 마당에 멍석을 내어깔고 모깃불을 피우시던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리고, 삶은 감자나 옥수수를 먹으며 어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머니 무릎 베고 누워 바라보던 나지막한 초가지붕 위로 보름달처럼 둥근 박 덩이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던 흰 박꽃의 기억들이…
박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이 재배해 온 전통작물 중의 하나다. 그런 연유로 당연히 우리 꽃이라 여기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흥부전에 보면 흥부는 다친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 주고, 제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강남 갔다 돌아오며 박 씨를 물어다 주어 흥부의 인생 역전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박은 아프리카, 열대 아시아가 고향이다. 꽃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호기심에 원산지를 찾아보게 되는데 박꽃처럼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해 온 꽃들은 굳이 고향을 따지는 게 별 의미가 없지 싶다. 왜냐하면 박꽃은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고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정겨운 꽃이기 때문이다. 박꽃을 보면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누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꽃은 피어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때로는 박꽃처럼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발화점이 되기도 한다. 살이에 부대끼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만나서 정을 나누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커다랗고 둥근 박을 바라보며 그 하나의 박이 열리기까지 여름내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운 박 덩굴처럼 열심히 살았을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접어두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었으면 싶다. 그리하여 어느 해보다도 마음 흐뭇한 풍요로운 한가위가 되었으면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