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록 절정의 단풍은 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희귀수목인 망개나무를 직접 보고, 주왕산의 깃대종인 바위 암벽에 붙어사는 둥근잎꿩의비름을 대전사 입구 상가에서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함께 산행을 했던 지인은 꽃 이야기만 쓰지 말고 열매에 관한 글도 좀 써보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주었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예쁜 꽃도 결국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임을 감안한다면 굳이 꽃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어 그러마고 했다. 가을은 열매가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도 곱지만 잎을 내려놓은 가지 위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열매들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다. 꽃과 열매가 아름다운 이유는 유혹에 목적이 있다. 자신의 수분을 도와주고, 씨앗을 널리 퍼뜨려 줄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유혹하기 위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꽃과 열매의 아름다움은 눈맛에서 차이가 난다. 쓰고, 달고, 시고, 매운 열매의 다양한 '맛'처럼 열매는 모양, 색깔, 맛, 향의 꽃에 못지않은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가을이 되어서야 진면목을 드러내는 참빗살나무는 학창시절 장삼이사에 지나지 않던 초등학교 동창이 수십 년 만에 성공하여 존재감을 자랑하듯 참빗살나무는 가을이 되어서야 매력적인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마치 솜씨 좋은 미용사가 염색이라도 한듯 곱게 물든 단풍도 아름답지만 보라색이 감도는 분홍색 열매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매혹적이다. 자줏빛 도는 분홍 열매는 좀 더 무르익으면 네 갈래의 봉합선이 갈라져 새빨간 열매가 드러나며 한껏 매력을 발산한다.


잎이 진 뒤에도 오래도록 달려 있는 참빗살나무의 고운 열매를 보고 있으면 꽃에게만 천착하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일찍이 정현종 시인이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꽃을 보고, 나무를 보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순간순간 오감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닉하기보다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대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팍팍한 삶이 조금은 더 여유롭고 멋스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꽃의 시간도, 열매의 시간도 유한하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외기가 냉랭해질수록 매력을 더하는 참빗살나무 열매를 보며 찬 겨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