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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 숲의 홍보석 '노박덩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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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 숲의 홍보석 '노박덩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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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거리는 온통 낙엽의 물결이다. 가을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던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밤새 몸살이라도 앓은 듯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소공원의 벚나무들은 바람도 없는 허공으로 물든 이파리를 함부로 뿌려대며 몸을 비우는 중이다. 서둘러 잎을 내려놓은 채 고요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운문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법문이 부록처럼 따라온다. 가을바람에 잎이 진 뒤에야 나무의 본체가 완연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른 봄부터 어여쁜 꽃만 탐하던 나를 번쩍 정신 차리게 하는 장군죽비 같은 말씀이기도 하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휴일 저녁, 경기도 포천의 '하늘아래 치유의 숲'에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노랗고 붉은 열매에 우연히 눈길이 닿았다. 청청한 잣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저만치서 내 눈길을 잡아끌던 것, 다름 아닌 노박덩굴 열매다. 잎이 모두 진 길가의 나뭇가지 위로 빛나는 노랗고 붉은빛에 이끌려 발길을 옮기게 했던 주인공이다. 나도 모르게 노박덩굴을 향해 다가서는데 나뭇가지 사이를 날며 열매를 쪼고 있는 푸른 깃의 새가 눈에 띄었다. 언뜻 보면 까치와 비슷하지만, 까치보다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하며 푸른 날개와 긴 꼬리가 아름다운 물까치다. 노박덩굴 열매는 예쁘기도 하지만 물까치나 어치 같은 새들의 귀한 겨울 식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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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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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 열매.

노박덩굴은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낙엽지는 덩굴나무다. 노박덩굴이란 이름은 덩굴성 줄기가 길 위에까지 뻗어 나와 길(路)을 가로막는다는 뜻의 노박폐(路泊廢) 덩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뜻하는 노방(路傍)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데 어느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오랜 세월을 두고 지어졌을 식물 이름의 유래를 따지는 것은 정작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격이다. 그보다는 대자연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는 나무들의 삶과 지혜를 배우는 게 훨씬 낫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20여 종의 노박덩굴과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줄사철나무, 화살나무, 회나무, 참빗살나무, 갈매나무, 미역줄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특징은 열매가 가종피(假種皮)로 싸여 있다는 점이다. 가종피란 주목 열매와 같이 육질로 된 종자의 껍질을 말한다. 노박덩굴은 산의 양지바른 길가나 구릉에서 자생하고 5~6월에 꽃을 피우는데 꽃도 작고 황록색이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정작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잎이 진 뒤 모습을 드러나는 붉은 열매다. 규칙적으로 갈라지는 노란색의 과피 사이로 드러난 붉은 열매는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가히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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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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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 열매

노박덩굴이란 이름만 들으면 칡이나 등나무 같은 덩굴을 연상하기 쉽지만 오래 묵은 노박덩굴의 밑동은 여느 나무 못지않게 굵은 것도 있다. 노박덩굴의 어린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열매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약성이 뛰어나 활용도가 높은 식물이다.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살균 및 진통효과가 있어 관절염이나 벌레 물린 데에도 효험이 있다.

꽃이 식물의 정수이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것은 분명하나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꽃은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흔히 가을을 두고 열매가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노박덩굴 열매를 보면 그 말이 헛말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고 한 보르헤스의 말처럼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꽃이 있고, 그 꽃이 피었던 자리엔 어김없이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힌다. 어디에 눈길을 주든 그것은 오롯이 당신 몫일 뿐,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눈길 가는 데에 마음 가듯 이끌림은 선택사항이 아니므로.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