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서는 동지(冬至)다. 요즘은 난방도 잘 되는 집과 오리털 점퍼도 있으니 혹한의 추위가 닥친다 해도 그다지 걱정할 일은 못 된다. 오히려 겨울 추위보다 더 매서운 세상의 한파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속의 한기를 몰아낼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한 세상에서 마음에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면 꽃을 그리며 봄을 기다리던 옛사람들의 멋과 낭만이 깃든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려보라 권하고 싶다.
흐린 날은 매화 위쪽을 칠하고,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에는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했다. 하루 한 송이씩 붉은 색을 칠할 때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꽃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절기상으로는 경칩과 춘분의 중간쯤이 된다. 소한도를 걷어내고 문을 열면 어느덧 뜰의 매화나무 가지엔 꽃이 피어 있고, 정말 그리던 봄이 와 있는 것이다.
구구소한도를 보며 하고 많은 꽃 중에 하필이면 왜 매화를 그렸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매화가 다른 나무보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화의 매(梅)자를 파자(破字)하면 나무 목(木)과 어미 모(母)자가 된다. 그러니까 매화는 겨울 끝에서 봄을 낳는 나무, 즉 봄의 어머니이다. 다른 꽃들은 봄이 오면 꽃을 피우지만, 매화는 꽃을 피워 봄을 부루는 꽃이다.
매화는 장미과 식물로 꽃을 강조하면 매화나무가 되고, 과일을 강조하면 매실나무가 된다. 매실은 해독작용이 뛰어나 식용과 약재로 다양하게 쓰인다. 매화는 피는 시기에 따라 일찍 피어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피어서 동매(冬梅), 눈 속에 피어 설중매(雪中梅)로도 불리며, 또 색에 따라 백매, 홍매, 청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중에도 눈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설중매(雪中梅)는 이름만으로도 운치 있고 매혹적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눈 속의 매화를 찾아 탐매의 길을 나서기도 했다.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로 불리며,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선비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세한삼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신흠은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고 했다. 설중매의 고매한 자태를 선비의 기개와 지조에 빗대어 한 이 말은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선생의 평생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옛 선비들이 풍류가 깃든 매화를 그리며 봄을 기다린 것처럼 현실의 삶이 힘들지라도 마음속에 '구구소한도'를 그려나간다면 이 겨울이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