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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선릉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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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선릉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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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봄비 오는 날, 선릉을 찾았다. 강남에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래전부터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선릉역을 지나칠 때마다 불쑥 지상으로 올라와 찾아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그곳을 찾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2016년 제16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정용준의 소설 ‘선릉 산책’을 읽은 뒤였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제목처럼 선릉을 산책하며 자폐증을 지닌 청년을 돌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가장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폐증을 지닌 한두운이 선릉 숲의 나무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닫혀 있던 주인공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숲길로 들어서자 자폐 청년 한두운은 걸음이 경쾌하고 빨라진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 잡은 벌레에 줄을 감고 있는 거미나 매미의 허물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신기해 한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앞서 걸으며 나무가 친구라도 되는 듯 편하고 부드럽게 나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오리나무를 시작으로 화살나무, 자귀나무, 전나무…. 보살핌과 배려의 의무 속에서 시작된 곤혹스러운 ‘산책’이 서로에게 건네는 언어의 새로운 발견 속에서 의미 있는 ‘산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허물어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선릉 산책’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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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은 소설을 떠올리며 매표소를 지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선릉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518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조선은 518년이란 역사 속에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현재 40기의 능이 보존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조선 왕릉은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남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선릉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곳이다.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정자각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성종, 오른 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1970년대 개발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 모습이 잘 보전되어 있다.

코로나19 때문인지, 비가 내리는 탓인지 숲길엔 인적이 뜸했다. 도심에서 한 걸음만 비켜서면 이렇게 조용하고 사색하기 좋은 숲길이 있다는 게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다. 왕릉으로 향하는 숲길은 역사적으로 고귀한 가치를 지닌 때문일까, 평범한 숲길로 다가오진 않는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란 느낌 탓인지 독특한 분위기가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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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뒤를 따르는 발자국 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숲길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버드나무 가지엔 연둣빛 안개가 서려 있고 송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엔 솔향이 그윽하다. 세상은 시끄러워도 선릉의 숲길에도 봄은 찾아와 꽃이 피었다. 연분홍 진달래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노란 산수유도 한창이다. 일찍 새 잎을 내는 귀룽나무는 벌써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눈길을 잡아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둘러본 재실 옆에서 히어리를 발견한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송광납판화로도 불리는 히어리는 이름만 들으면 외래종 같지만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조록나무과에 속하는 히어리는 꽃이 일찍 피어 풍년화, 납매, 영춘화와 더불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도심 속 빌딩과 어울려 독특한 경관을 연출하는 선릉은 삭막한 도시에서 자연과 쉽게 만날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자 아름다운 숲길이다. 일상에 치이고 자동차 소음에 지친 사람이라면 잠시 짬을 내어 선릉을 산책해보라 권하고 싶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나면 틀림없이 새로운 기운이 솟아날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