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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두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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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두에 물들다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온 세상이 우울증을 앓아도 숲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우울감을 떨쳐 버리기엔 숲만큼 좋은 장소도 없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던 '야생의 위로'의 저자 에마 미첼은 자신의 저서에서 "나를 자살의 목전에서 붙잡은 것은 도로 중앙분리대에 있던 은은한 초록빛을 띤 묘목이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숲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진다. 초록의 숲은 치유의 공간이자 영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회귀본능은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 내가 숲을 찾은 것은 연두를 보기 위함이었다. 어느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연두가 흐른다'는 문장을 읽고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신록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새잎이 피어나는 이 때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연둣빛! 노랑과 초록이 적당히 어우러진 신비한 생명의 색이 연두색이다. 연두(軟豆)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연두는 완두콩의 빛깔을 닮은 색이란 말이다. 하지만 연두를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규정짓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나는 봄 숲을 생각하면 다양한 색감과 느낌을 지닌 연두가 떠오른다. 늘 걷던 길도 햇빛 때문에 다르게 보인다. 같은 연두색의 이파리라도 햇빛을 받았을 때와 그늘에 있을 때의 느낌이 다르고, 순광으로 보았을 때와 역광으로 보았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떡갈나무 새잎과 붉나무의 새순이 지닌 오묘한 색깔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서 한 마디로 표현할 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그 오묘한 색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색이 봄 숲의 연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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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신록이 마치 숲 전체가 꿈을 꾸는 듯하다. 그 연둣빛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숲을 찾았는데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연분홍의 철쭉이다. 연두가 흐르는 숲의 허공을 점점홍으로 수를 놓고 있는 철쭉의 싱그러움이라니! 진달래가 지고 난 뒤 피어나는 철쭉은 꽃도 훨씬 크고 분홍색이 진달래보다 훨씬 연해서 싱그러운 봄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다투어 피던 봄꽃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사이, 은밀하게 연둣빛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숲은 늙은 엄마의 품처럼 조금 쓸쓸하고 많이 따뜻하다.

통 성냥에 불을 그어댄 듯 한꺼번에 화르르 타올랐다 져 버리는 벚꽃의 향연도 장관이지만 신록의 숲속에서 자신만의 색과 향기로 공간을 채우는 늦은 봄꽃들도 각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길을 벗어나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매화말발도리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매화말발도리는 가파른 바위 절벽 틈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마다 순백의 꽃을 내어달고 은은한 향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세상이 뭐라 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욕심내는 법도 없이 묵묵히 꽃을 피워 자신만의 향기로 허공을 채우는 저 꽃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불평도 많고 엄살이 심했던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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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잎을 틔운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오리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생강나무, 때죽나무…… 마치 소꿉놀이 하던 어린 시절의 정다운 벗들을 부르듯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면 나의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무들은 파르르 가지를 떨며 이파리를 흔들어 댄다.

아직 색칠이 끝나지 않은 아이의 그림처럼 아직은 여백이 많은 봄 숲, 초록이 미처 채우지 못한 나무 틈새로 비껴드는 햇살이 숲길을 비추고, 숲 어딘가에서 끊길 듯 이어지는 쑥국새 울음소리가 산을 넘어 온다. 나의 슬픔이나 괴로움, 시린 한숨이나 뜨거운 눈물까지도 숲에 두고 오면 향기로운 꽃이 될 것만 같은 신록의 숲을 돌아 나오는 내 몸에도 어느새 연두에 물든 듯하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