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시인은 '오월의 시'에서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오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라고 노래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보는 이를 압도하고 깊은 골짜기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2단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보이고 뒤이어 눈앞에 펼쳐지는 도원! 복사꽃 향기가 안개처럼 둘러싼 듯 아스라한 먹빛, 별처럼 빛나는 붉은 복사꽃, 단아한 집 세 채는 도원 위쪽에 숨은 듯 앉아있고 인적은 간 데 없는.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꾸었던 꿈 이야기에 천재화가의 상상력이 보태어져 화폭 위에 붓으로 펼쳐 놓은 무릉도원이라면 창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은 자연이 그린 한 폭의 진경산수화인 셈이다.
눈길 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 가는 곳으로 몸이 기울게 마련이다. 날마다 도봉산을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한 번은 다녀오리라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노랑제비꽃이 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아침 일찍 간단한 요깃거리가 든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챙겨 산으로 향했다.
집중력 회복 이론에 의하면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고,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으며, 오감을 통해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곳은 사람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어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고 한다. 그 곳을 가리켜 '자연지역'이라 하는데 집의 정원이나 공원, 산책로, 숲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등산로 입구엔 벌써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봄이 겨웁도록 코로나와 전쟁을 치르느라 나들이를 삼갔던 사람들이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일시에 쏟아져 나온 듯하다.
초록물이 뚝뚝 듣는 듯한 숲 그늘을 따라 산을 오르며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에 취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초록은 살찌고 화홍은 야위어 가는 녹비홍수(綠肥紅瘦)의 계절. 점점홍으로 수를 놓던 철쭉도 시나브로 떨어지고 숲은 점점 초록 일색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우이암을 향해 산을 오르다 어느 굽이에선가 노랑제비꽃을 보았다. 오월의 햇살 아래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난 노랑제비꽃의 자태는 앙증맞고 귀엽기 그지없다. 홀로 신이 나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는데 뒤 따라오던 등산객들은 무심히 나와 꽃을 지나쳐 간다.
우이암 전망대에 올라서니 다리도 지치고 숨이 턱에 찬다. 노랑제비꽃도 보았으니 이만 내려가도 되겠지만 생각을 바꿔 내친 김에 일반인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신선대까지 오르기로 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니 지금 포기하면 다시는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신선대에 올라 서울의 풍경을 발아래 굽어보며 산에 오길 참 잘했단 생각을 했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어느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