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24년 여름에 ‘소서팔사(消暑八事)’란 시를 지어 더위를 이기는 8가지 피서법을 이렇게 적었다. 대자리 위에서 바둑 두기, 소나무 숲에서 활쏘기, 누각에서 투호놀이 하기,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 타기,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한시 짓기, 달 밝은 밤에 발 씻기이다. 그 외에도 여유와 풍류를 즐기던 옛사람들은 서늘한 계곡을 찾아가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뱃놀이하는 선유(船遊),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귀와 마음을 씻는 관폭(觀瀑) 등으로 여름을 났다.
그 중에도 탁족(濯足)과 청선(聽蟬)은 전통적으로 선비들이 더위도 피하고 정신도 수양하던 방법이었다.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것은 비단 더위를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살이의 먼지(世塵)도 함께 씻어낸다는 의미가 있었다. 청선은 말 그대로 숲속에서 매미소리(蟬吟)를 즐기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매미를 가을의 전령으로 여겼다. 매미소리를 들으며 "이제 여름도 물러가는 구나" 하면서 마음으로 더위를 물리쳤다고 한다.
선풍기나 에어컨도 없이 기껏해야 손부채와 죽부인으로 여름을 견뎌야 했던 옛사람들의 피서법을 살펴보면 어디에나 자연이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아무리 태양의 열기가 뜨거워도 찡그리며 피어나는 꽃이 없듯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며 오감을 열어놓으면 폭염의 여름도 짜증스러운 계절이 아닌 낭만이 넘치는 계절이 될 수도 있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만나는 게 여전히 꺼려지는 요즘 나는 더위가 느껴지면 어쩔 수 없이 녹음 짙은 숲길을 걷는다. 숲 그늘은 무더위를 식혀줄 뿐만 아니라 늘 나의 시선과 마음을 묵묵히 받아주는 초록의 숲은 내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던 어머니의 마음 같아 편안하다.
숲은 늘 새롭다. 익숙한 길이라 해도 어제 보았던 풍경과 오늘 바라보는 풍경은 색다르다. 어제 보았던 꽃은 사라지고 오늘은 또 새로운 꽃이 나를 반긴다. 푸르던 열매는 어느덧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고,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숲은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숲길엔 울통불퉁한 요철이 있고 굽이를 틀 때마다 매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새소리,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절에 따라 나무와 풍경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쁨을 얻는 숲길을 걷는 것은 단순한 산책이나 운동이기보다는 즐거운 자연탐구생활이라 할 수 있다.
숲길을 걷다가 무덤가에서 빨간 열매를 가득 내어 단 양보리수나무를 만났다. 토종의 보리수 열매와는 확연히 다르게 큼지막하고 탐스러워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호기심에 몇 개 따 먹어 보니 어릴 적 고향에서 먹던 보리수 열매보다 떫은맛이 덜하고 달달한 것이 먹을 만하다. 하루가 다르게 열기를 더해가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도 보리수나무는 이토록 탐스런 열매를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더위에 투정부터 부렸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누군가는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숲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