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긋고 간 오후 잠시 짬을 내어 숲길을 걸었다. 둘레길 입구에 있는 간송 옛집은 코로나 때문에 여전히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담장 너머로 점박이 나리꽃이 수줍은 처녀처럼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서 있다. 녹음 짙은 숲으로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숲이 출렁이고 나무들은 물방울을 털어낸다, 목덜미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섬뜩하다. 산책로엔 비바람에 떨어진 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흙길은 나의 몸무게를 기분 좋게 받아준다. 젖은 숲에서 나는 풀 비린내와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흙내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밤새 물이 불었는지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기상이변으로 최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홍수로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나무들이 울창한 숲속은 다만 젖어 있을 뿐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도시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른다. 깊은 강물이 소리 없이 도도히 흐르듯 숲의 시간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흐르면서도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숲은 비를 토양으로 스며들게 하고 저장시킨 후 이것을 적절히 방출하는 자연적인 녹색 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건강한 숲은 평지보다 단위 면적 당 약 3.4배나 많은 물을 흡수할 뿐 아니라 저장능력도 뛰어나다. 빈약한 숲이 있는 지역에 비해 약 2.5배 정도 더 많은 물을 저장한다고 하니 숲이 지닌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숲 토양이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숲이 가진 높은 생물 다양성 덕분이다. 숲에 사는 수많은 나무와 다양한 생물들이 흙에 풍부한 유기물을 공급하고 통기성과 투수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둘레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바닥 공원을 들렀다. 공원 산책로엔 제법 사람들이 많다. 더러는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바쁜 걸음으로 파워워킹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빗물에 곤죽이 된 황톳길을 무릎까지 옷을 걷어 부치고 맨발로 걷는 사람도 보인다. 보기만 해도 보드라운 황토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다. 공원에는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꽃들이 심어져 있어 꽃을 보며 걷기에 더없이 좋다. 코로나 때문에, 혹은 비 때문에 문밖을 나서기가 꺼려지는 요즘이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까운 공원이라도 찾아 걸어볼 일이다. ‘처음엔 그냥 걸었어…’로 시작되는 노랫말처럼 그냥 걷다 보면 꽃이 보이고 숲이 보이고 덩달아 당신의 기분도 좋아질 것이다. 틀림없이.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