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는 수피가 특이하고 아름다운 나무다. 마치 정성들여 콩댐을 한 장판처럼 반질거린다. 껍질은 얇게 벗겨지면서 흰색 무늬가 생긴다. 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늦가을까지 꽃이 피어 목백일홍으로도 불린다. 기억해야 할 것은 꽃이 한 번 피어 백일 동안 붉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피고지기를 거듭하며 꽃빛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꽃은 홍자색이 대부분이지만 흰색도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도 나무에 간지럼을 태우면 미동이 없던 가지가 가늘게 떨리기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수줍음을 타는 듯 몸을 떠는 나무를 보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자발적 고립을 택해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낸다. 그러다 정 갑갑증이 일 때면 이따금 마스크를 쓰고 천변을 산책하거나 가까운 숲을 찾아 걷는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흠칫 거리를 두고 걷게 된다. 이러다가 대인기피증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다. 그런데도 자연은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된다. 길을 걷다가 새로 피어난 나팔꽃을 보거나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능소화를 만나면 눈에 생기가 돌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던 우울감도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오늘은 천변에서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났다. 멀리서 바라보는 왜가리는 고요하기만 하여 마치 정물처럼 느껴진다. 왜가리는 다가서는 나의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미동도 없이 수면만을 주시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쏜살같이 물속으로 부리를 찔러 넣는다. 다시 걷어 올린 부리에는 커다란 붕어가 물려 있다. 퍼덕거리는 붕어를 몇 번인가 놓았다 물기를 거듭하더니 기어코 통째로 삼킨다. 왜가리의 긴 목을 넘어가는 붕어의 마지막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물고기를 삼킨 왜가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잠시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허공을 날아올라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왜가리가 날아간 빈 하늘엔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잠자리 떼가 맴을 돈다. 어느새 밤나무 가지엔 푸른 밤송이들이 주먹만큼 굵어져 있고, 쥐방울덩굴 군락지에선 꼬리명주나비들이 춤을 추며 날고 있다. 나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잠시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바람에 끝내 담지 못했다. 코로나로 힘든 중에도 우주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자연의 순환은 지속된다.
코로나를 퇴치하는 최고의 백신은 행동백신이라고 한다. 비말로 전파되는 코로나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스스로를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는 것이다. 본래 위리안치란 죄인을 유배지에서 가시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립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암담하기는 하지만 장마에 흐려진 물이 맑아지듯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엔 세상은 다시 평온해질 것을 믿는다.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다.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점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실하게 버티는 힘,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요즘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