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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은행나무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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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은행나무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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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뜨락에 맨드라미 유난히 붉다.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가을 볕 아래에선 세상 만물이 자신의 색을 더욱 또렷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휴일 아침, 간단히 짐을 꾸려 가까운 숲을 찾았다. 찬 이슬 내린다는 한로가 지난 탓인지 숲 그늘에 들자 옷섶을 헤집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며칠 새 나무들도 수척해진 듯하고 산책로엔 낙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비록 꺼칠하긴 해도 아직은 숲의 나뭇잎들이 초록 일색인 것으로 보아 설악에서 시작된 단풍이 여기까지 이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짧은 코스의 둘레길을 걷고 오랜만에 연산군 묘 앞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아갔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기엔 이른 때이지만 그간의 안부가 궁금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를 포크레인에 달린 집게발로 둥치를 잡아 흔들어 은행 열매를 터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은행 열매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뉴스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나무라서 열매가 열리지 않아 거리의 은행나무처럼 수난을 당할 까닭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쯤 찾아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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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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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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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흔히 살아 있는 화석으로도 불리는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백년을 사는 우리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품고 살아간다. 2억7000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해 온 은행나무는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으면 천년의 세월도 거뜬히 살아낸다. 방학동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55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미친 짓도 십년만 지속하면 의미가 생긴다는 말도 있고 보면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일찍이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란 시에서 붉은 대추 한 알에도 ‘태풍 몇 개/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 있다고 했는데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은행나무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곡절들이 숨겨져 있겠는가.

마침 방학동 은행나무 주변에선 은행나무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불현듯 몇 해 전에 참가했던 충북 영동의 은행나무 시제(詩祭)가 떠올랐다. 전국에 유명한 은행나무 노거수가 여럿 있지만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는 수령 천년의 은행나무를 기리는 문학행사로 나무를 주인공으로 열리는 유일한 문화행사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은행잎이 금빛으로 물들 때 맞추어 열리는 행사엔 전국의 시인들이 은행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은행나무 주위는 물론이고 산을 오르는 등산로까지 시화들이 가득 걸려 있어 오가는 이들의 시심을 자극한다. 그 행사에 다녀오며 오래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나무 한 그루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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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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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주위를 둘러친 철제 울타리엔 시인들의 시화가 빼곡히 걸려 있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걸린 시화 중엔 몇몇 반가운 이름도 눈에 띈다. 걸린 시화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은행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마치 시집이라도 한 권 읽고 난 것처럼 마음 가득 시심이 출렁거린다. 그 중에도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란 시가 소름 돋듯 마음 안섶에 돋을새김 되어 되살아난다. “나뭇잎이/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어 매끈한 것은/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별처럼 아름답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온통 우울해도 은행나무는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철 따라 새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어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찍 물든 벚나무 가로수 잎이 붉다. 벌레 먹은 낙엽 한 장 주워들고 생각한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어준 적 있었던가.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