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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한국은행 머릿돌 정초(定礎) 민족자본 수탈 어두운 친일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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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한국은행 머릿돌 정초(定礎) 민족자본 수탈 어두운 친일의 그림자

한국은행 본관 건물  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은행 본관 건물
한국은행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을 주도한 이토히로 부미의 정초석이 나왔다. 한국은행의 정초석은 이미 널리 알려진 명물이었다. 이 돌이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로 작성되었음이 이번에 공식 확인된 것이다. 해방 건국이 된지 70년이 훌쩍 넘도록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한복판에 한반도 식민지 건설의 장본인인 이토 히로부미의 정초석이 중앙은행 초석의 명물로 추앙받아왔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 의사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문화재청은 2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즉 사적 제280호의 정초석(머릿돌) '定礎(정초)' 글씨가 이토 히로부미가 쓴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체 관련 전문가 3명으로 자문단을 구성해 현지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최근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이토 친필로 머릿돌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담긴 간행물을 제시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한데 따른 것이다.
전용기 의원이 제시한 간행물은 조선은행이 1918년 발간한 영문잡지 '조선과 만주의 경제 개요'(Economic outlines of Chosen and Manchuria)이다. 이 책은 지금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 버클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 6쪽에는 '이 건물의 정초석은 이토 공작의 친필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담겨 있다. 문화재청은 이 자료를 토대로 '일본 하마마츠시 시립중앙도서관 누리집'에 있는 이토 붓글씨와 '조선과 만주의 경제 개요'에 게재된 당시 머릿돌 사진 등을 비교해 진상을 밝혀냈다. 그 조사 결과 머릿돌에 새겨진 '定礎' 글자는 이토가 먹으로 쓴 글씨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하게 내려쓴 획 등을 볼 때 이토 글씨의 특징을 갖고 있어 그의 글씨임을 분명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또 글씨를 새기는 과정에서 획 사이가 떨어져 있어야 하는 부분이 붙어 있고 붓이 지나간 자리의 서체를 살리지 못한 점 등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 고증 결과를 서울시와 중구청 그리고 한국은행에 통보할 예정이다. 그런 다음 한국은행이 안내판 설치나 '정초' 글 삭제 등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하면 문화재청은 전문가들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관리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한국은행 본관은 1907년에 착공해 1909년 정초를 세웠다. 그후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된 건축물이다. 일본제국는 여기에 있던 조선은행을 통해 한반도 경제 침탈을 자행했다. 광복 후인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조선은행의 인원과 건물 등을 승계받았다.

한국은행 초석이 이토 히로부미의 것이라는 주장이 오래 전 부터나왔다. 계속되는 ‘이토 히로부미 친필’ 지적에도 한국은행과 문화재청은 정초석에 대한 고증과 조치 책임을 서로 미룬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은행과 문화재청이 전용기 의원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문화재청과 협의했으나 마땅한 고증 방법이 없었다”고 답변했다. 문화재청은 “한국은행과 고증에 관해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고 회신했다. 둘 중 하나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전용기 의원은 조치 책임에 대해서 서로가 할 일이라며 떠밀기에 급급했다고 지적했다. 전용기 의원은 “정부기관이 서로 책임을 떠미는 동안 아픈 역사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되어 왔다" 한탄을 했다.

일제 시대 조선은행은 일본 제일은행을 승계했다. 한국은행의 첫 뿌리는 일본 제일은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3년 일본 국립은행 조례에 따라 민간 은행인 제일 국립은행(第一国立銀行)이 설립되었다. 이 은행이 일본 최초의 은행이자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초대 은행장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일본 제일은행은 1878년 부산에 지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원산·인천·서울 등 조선 땅에 지점을 냈다. 그러다가 1884년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는 댓가로 인천항 등의 해관세 취급 특권을 얻었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가 다른 나라와 차관 교섭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등 한국 정부의 화폐 계혁을 못 하도록 개입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또 일본 상인들의 한반도 금융 장악을 지원하는데에도 앞장 섰다.

이 제일은행은 1902년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없이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은행권을 발행·유통하였다. 러일 전쟁 중에 맺어진 제1차 한일 협약을 업고 1905년부터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역할은 조선총독부 설치 후 1911년 조선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9년 부터 한동안은 한국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일본 제일은행은 이후 분할·합병을 거듭하여 2013년 이후부터는 미즈호 은행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뿌리는 일본 미즈호 은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 제일은행이 1911년 8월 조선은행법에 따라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늘날 한국 은행 건물은 1912년 1월 일본인 다쓰노긴코(辰野金吾)가 설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좌우대칭의 고전적인 석조 르네상스식 화강암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오늘날까지 명 건축으로 이름을 날려왔다. 일제는 바로 이 건물에서 한국 금융계를 장악하면서 식민 경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제일은행은 1909년 한국은행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한국은행이 한국 최초의 중앙 발권은행이었다. 이 은행은 1911년 일본이 '조선은행법'을 제정·공포함에 따라 같은 해 8월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해방때까지 식민지 중앙은행으로 행세했다. 조선은행권이라는 돈도 여기서 나왔다. 해방후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수행해왔다. 그러다가 강력한 권한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의 설립을 만들자는 요구로 1950년 6월 새로이 한국은행이 탄생했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는 소리가 높다. 그 청산은 경제적 독립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냄새가 진동하는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