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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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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변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을 뭉턱뭉턱 내려놓는다. 거리에 색종이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낙엽들을 보면 마치 축제가 끝난 행사장 같아 가슴 한편이 휑하다. 물든 잎을 내려놓고 허룩해진 나무들을 바라볼 때면 마치 큰 병이라도 앓고 난 환자 같아서 일견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잎이 진 뒤에야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벽암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을 떠올리면 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그동안 자신을 치장했던 무성한 잎들을 모두 내려놓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것은 비움이자 처음으로 돌아감이다.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나목이 된 나무들을 보면 마치 죽은 듯 보이지만 그것은 잎과 꽃을 모두 비우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음 해에 다시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나무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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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가을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늦은 가을, 거리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쓸쓸해져서 시를 못 쓰면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어진다. 이렇게 우리의 시심을 자극하기도 하는 낙엽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무에서 영양분이 가장 많은 곳은 뿌리도 줄기도 아닌 바로 잎이다. 잎에는 엽록소가 있어 햇빛을 받으면 광합성을 통해 영양분을 만들기 때문이다. 잎이야말로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공장인 셈이다.

따라서 이토록 영양분이 많은 잎을 그대로 버린다면 나무로선 막대한 에너지 낭비가 된다. 나무는 잎이 지기 전에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의 절반을 줄기로 옮겨 놓는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이른 봄부터 잎과 잎자루 사이에 ‘떨켜층’과 ‘보호층’을 만들어 잎을 떨어뜨릴 만반의 채비를 한다. 떨켜층은 잎을 나무에서 분리하고, 보호층은 잎이 진 뒤에 세균의 감염을 막아 나무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무는 잎도 버리고 수피도 버리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지는 잎에도 무슨 순서가 있을까 싶지만 잎이 지는 데에도 엄연히 순서가 있다. 그렇다고 번호표 받고 순서대로 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호르몬 분비가 일찍 끝나는 곳에서부터 잎이 떨어진다. 성장호르몬이란 식물의 성장과 결실, 노화를 촉진하는 호르몬으로 식물의 어린 기관과 뿌리 같은 신체말단에서 만들어져 가장 늦게까지 분비된다. 따라서 봄에 가장 먼저 핀 잎이 가장 늦게까지 붙어 있고 가장 늦게 핀 잎이 제일 먼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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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부터 나무를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와 줄기 끝에서부터 잎이 피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잎이 자라서 여름내 무성하다가 가을이 되면 반대로 줄기 안쪽부터 잎이 지기 시작하여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잎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러하다는 말이다. 나무는 이렇게 가을이 되면 잎도 버리고 수피도 떨쳐내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낙화란 시에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했지만 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기보다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의 지혜를 헤아려보는 가을이었으면 싶다.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그 때가 좋은 때다/ 그 때가 때 묻지 않은 때다/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이생진의 ‘낙엽’ -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