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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헨리 조지와 변창흠 국토부장관 청문회 그리고 "진보와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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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헨리 조지와 변창흠 국토부장관 청문회 그리고 "진보와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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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참으로 말들이 많다.

변 장관 후보자는 서울도시주택공사 즉 SH의 사장 시절이던 2016년 당시 발생한 '구의역 김군' 사고와 관련해 "걔가 조금만 신경 썼었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SH 셰어하우스 입주자에 대해 "못사는 사람들은 밥을 집에서 해 먹지 미쳤다고 사 먹냐"라고 언급한 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세종대 교수 시절이던 2013년 4월에는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기존 재개발 정책을 이기려면 헌법 재판소와 대법원의 모든 판례를 다 뒤집을 만한 사회 운동을 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2015년 공동저자로 참여한 서적에서는 "유권자는 자기 집이 있으면 보수적, 없으면 진보적인 투표 성향을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SH와 LH 사장 시절 의혹도 제기됐다.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은 SH에 채용된 1급 이상 고위직 9명 중 7명이 그가 졸업한 환경대학원 동문 또는 측근 지인으로 채워졌다고 주장했다. 김은혜 의원은 사장 재임 기간 중 신규 임용한 52명 가운데 최소 18명이 후보자와 인맥과 학맥 등으로 얽혀 있다고 주장했다. 간부급 직원의 정치 성향을 분석했다는 이른바 'SH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도 나왔다. 운동권 출신의 허인회 전 녹색드림협동조합 이사장의 사업 확장을 도왔다는 의혹도 나왔다. 송언석 의원은 변창흠 후보자가 2006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아파트를 매매가의 57%에 달하는 3억원 가량을 카드사에서 대출받아 '영끌'로 구매했다고 지적했다. 장녀가 미국 예일대에 진학하는 과정에 국립중앙박물관 허위 인턴 경력을 제출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정동만 의원은 변 후보자의 딸이 자격이 안 되는 고등학생 시절 박물관 인턴을 한 것을 두고 '자녀 경력 만들어 주기' 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의혹 제기에 변 후보자는 물론 사실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필자가 정작 관심을 갖는 대목은 변 후보자의 학문적 성향이다. 학자 출신인 만큼 평소 다져온 학문적 성향이 앞으로 전개할 국토 또는 부동산 정책이 투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변창흠 후보자 2015년 한 언론 기고를 통해 학부 시절 헨리 조지의 저서 '진보와 빈곤'을 읽고 사회의 불평등을 결정짓는 부동산 문제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변 후보자가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시절 쓴 논문 ‘불로소득의 환수와 토지 공개념’을 보면 “토지정책의 방향은 토지의 공익적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이용 중심의 토지 이용이 이뤄줘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토지 소유권 보장을 전제로 한 보유세 강화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소유권과 개발권의 분리를 전제로 한 개발권의 양도제 도입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토지 개발에 따른 이익을 불로 소득으로 보고 환수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같은 주장은 헨리 조지의 이론과 맞닿아 있다.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1839년 태어났다. 1897년 까지 살다 간 인물이다. 헨리 조지를 가리켜 경제사상가 또는 경제학자라고 일컫는 분들이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헨리조지 자신은 단한번도 단 한번도 그 스스로를 경제 사상가나 경제학자로 칭한 적이 있다. 오늘날 정통경제학계나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그를 경제 사상가나 경제학자로 보지 않고 있다.

헨리 조지는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별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차드 S. H. 조지, 어머니는 캐서린 프랫 V. 조지였다. 아버지는 성공회 관련 종교 서적 출판을 했다. 아주 헌신적인 미국 성공회신자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헨리 조지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공회 학교에 들어갔다. 헨리 조지는 그러나 그곳의 성공회적인 훈육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졸업도 하지 않고 도중에 학교를 떠난다. 그 때가 14세 때이다. 헨리 조지가 공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그 때 까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중퇴 정도의 학력으로 볼 수 있다.

헨리조지는 15세가 되던 1855년 호주 멜번과 인도 콜카타로 항해하는 배 였던 힌두호(Hindoo)의 선원이 된다. 14개월 선원 생활을 마친 후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출판사의 식자공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아에 골드 러시가 일어났을 때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샌프란시스코 인근으로 갔다. 그곳에서 금광을 사 금 채굴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금을 캐내지는 못했다. 골드러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돈만 날린 꼴이 됐다. 헨리 조지는 그 즈음 호주계 미국인 애니 C. 팍스와 사랑에 빠졌다. 1861년에 결혼을 했다. 헨리 조지의 부인은 모계의 영향으로 아일랜드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다. 헨리조지의 자녀들은 엄마를 따라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됐다. 헨리 조지 자신은 개신교 신자였다. 결혼 후 헨리 조지는 신문사 인쇄공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완을 발휘해 편집인을 거쳐 발행인까지 올랐다. 그 경험을 토대로 후에 자기 소유의 신문사 San Francisco Daily Evening Post도 갖게 된다.거기서 꽤 돈을 벌었다. 헨리 조지와 그의 부인 애니 C. 팍스는 장남 헨리 조지 주니어는 훗날 뉴욕주의 하원의원이 된다. 둘째 리처드 F. 조지는 조작가로 컸다.

정치적으로 헨리 조지는 초기에 링컨을 따르는 공화당 당원이었다. 초기에는 링컨이 주도한 철도 건설을 열렬히 지지하였으나 철도와 광산 산업 현장에서 숱한 부정부패를 목도하면서 비판 가로 변해갔다, 헨리 조지가 1868년 쓴 철도 고발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기사의 제목은 "철도산업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란 것이었다.

헨리 조지는 그 신문기사에서 철도건설의 붐은 배타적 사업권을 갖고 있는 소수 특권층 및 관련 기업들에게만 혜택을 줄 뿐, 건설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를 절망적인 빈곤에 빠뜨린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은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의 경영진으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 경영진은 이 기사 이후 캘리포니아 주 하원 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려던 헨리 조지의 계획을 방해하게 된다. 헨리조지는 이후 토지 자본가를 비판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한다.

이후 헨리 조지는 뉴욕 시를 방문하면서 오랜 기간 발전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덜 개발된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 관찰을 토대로 쓴 기사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진보와 빈곤" 의 토대가 된다 .헨리 조지는 이 기사에서 시장경제 체제에서 사회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창출되는 부(wealth)의 상당부분이 경제적 지대(rent, economic rent)라는 명목으로 토지 소유자와 독점 사업자에게 옮겨진다면서 바로 이 불로소득(unearned income)의 집중이 가난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기사를 모은 책 "진보와 빈곤"은 당대에 3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그때가 남북전쟁 직후인 1879년 이다. 헨리 조지는 노동에 대해서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자연에 의해 거저 주어지는 토지에 대해서는 토지 소유자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심각한 불의(injustice)라고 갈파했다.

헨리 조지는 불의를 해소할 대안으로 토지세를 주창했다. 정부가 토지의 가치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저 토지를 소유했다는 명분만으로 지주들이 불로소득을 사유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자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주창한 토지세는 순수하게 토지의 가치에만 부과하는 세금이다. 토지에 가해진 개량 즉 정지작업과 심겨진 수목, 건물, 그리고 각종 시설물 등의 가치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토지에 가해진 개량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 토지 개량 행위에 따른 이익은 그 투자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일약 저명 작가가 된 헨리 조지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뉴욕시로 이주한다. 1886년 헨리 조지는 연합노동당(the United Labor Party) 후보로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연합노동당은 중앙노동조합(Central Labor Union)이 만든 정당이었다. 뉴욕시장 선거에는 득표율 2위로 낙선했다. 이듬해인 1887년 헨리 조지는 또 뉴욕주 국무장관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헨리 조지의 주장은 유럽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유럽에서 위축되어 있던 노동운동이 헨리 조지의 주장에 고무되어 다시 활발해진 것이다. 노동 운동의 배경에 헨리 조지가 있음을 파악한 로마 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불순한 사상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특히 전 세계에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교황청으로서 보유한 토지에 대해 세금을 메겨야 한다는 헨리조지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실제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이라고 보고 경계령을 내렸다. 헨리 조지의 지지자였던 가톨릭 노동운동 지도자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파면하게 된다.

교황청 과의 대립으로 헨리조지는 더 유명해졌다. 훗날 유럽 노동자들은 헨리 조지를 이론적 스승으로 옹립하게 된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조지주의(Georg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을 조지스트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신독재시절 운동권 학생 들에게 널리 읽혔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 후보자도 조지스트로 분류된다. 변 후보자가 활동한 연구소나 학회에는 조지스트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변 후보자는 2014년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쪽방ㆍ비닐하우스촌 등 도시 빈곤지역에서 현장 활동을 했던 도시빈민연구소가 모태이다. 변 후보자이외에도 김수현 세종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강현수 국토연구원장. 하성규 한국주택관리연구원장 그리고 김용창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등이 학문적 동지이다. 김수현 전 실장과는 한국도시연구소 활동 이전에도 2000년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의 전신인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함께 근무했다. 변 후보자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으로 부임한 2014년 말부터 김수현 당시 서울연구원 원장과 함께 ‘서울형 도시재생’ 사업을 이끌기도 했다.

한국도시연구소는 한국공간환경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한국공간환경학회를 만든다. 지금도 공간환경학회 소속 학자들이 한국도시연구소의 핵심 주축을 이루고 있다. 김수현 전 실장을 비롯해 강현수 원장, 조명래 환경부 장관 등이 공간환경학회의 학회장 출신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