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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곡지(曲枝)와 깃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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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곡지(曲枝)와 깃발나무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어도 코로나는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일 년, 산은 마스크에 갇혀 사는 내가 답답한 숨을 몰아쉴 수 있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새해에도 산은 나의 숨구멍이 되어줄 것이고 산을 찾는 나의 발걸음은 잦아질 것만 같다. 매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해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보며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 그들도 사람 못지않은 치열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를수록 그들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야말로 가장 생생한 가르침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들이 소리 없이 내보이는 꽃 한 송이, 몰래 내어놓는 연록의 새순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산을 오르며 나무들의 표정을 살피다 보면 그들이 묵묵히 살아낸 세월이 읽혀진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라 울울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이리 휘고 저리 굽어서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게 하는 나무도 있다. 토질이 좋고 경사가 완만한 저지대엔 곧게 자란 나무들이 많지만, 바람 거세고 바위투성이인 높은 곳으로 갈수록 굽은 나무들이 많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맞추어 가며 살아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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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지(曲枝)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굽은 가지를 이르는 이 말은 산등성이나 바위틈에서 이리저리 뒤틀린 나무를 가리킨다. 누구라도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에 휘어진 가지를 늘어뜨린 푸른 소나무를 보고 한두 번쯤은 탄성을 질러 보았을 것이다. 그 휘어진 가지가 바로 곡지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이 수려한 모습은 그저 아름답다고 탄성만 내지를 수 없는 나무들의 고난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모든 식물은 한 번 뿌리 내린 곳이 제 삶의 터전이자 무덤이 된다.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삶의 터전을 옮길 수 없는 나무들은 한 번 뿌리 내린 곳이면 그곳이 어디이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몸을 맞춘다. 바람이 세차면 바람이 덜 부는 쪽으로 가지를 뻗고 햇볕이 부족하면 햇살 쪽으로 몸을 비튼다. 뿌리를 뻗다가 바위를 만나면 옆으로 틀기도 하면서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찾아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이리저리 뒤틀린 모습이 되기도 한다. 못난 사람을 위로할 때 흔히 쓰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은 나무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억울한 말이다. 나무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몸을 맞춰 사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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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이나 백두산 같은 고산 지대에 가면 깃발나무란 것이 있다. 깃발나무란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나무를 가리킨다. 항시 바람이 거센 높은 곳에서 자라다 보니 사방으로 고르게 가지를 뻗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것이다. 나무들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그 환경을 원망하는 법이 없다. 다만 그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록키산맥에 가면 수목한계선인 해발 3000m 부근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휘어져 무릎 꿇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꼿꼿이 서서는 도저히 바람을 견디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무릎을 꿇듯 몸을 굽힌 채 살아간다고 한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최소한의 성장을 하면서 한껏 키를 낮추고 사는 것이다. 명품 바이올린은 수목한계선 부근에서 자라는 휘어진 나무로 만드는 데 그 이유는 목질이 단단해서 울림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세우고 희망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무처럼 현실에 순응하며 견디며 사는 것도 대단한 용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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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