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 왈 “미국에서는 거대기업 총수가 한국처럼 수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은 검찰이 총수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면 발급은 해주지만 보석금을 내면 바로 풀려준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재판부에 이 부회장 보석을 신청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보석금을 내고 며칠 후 집에 돌아갔다면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되풀이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비난이 들불처럼 번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그는 ‘이미 처리된 사건을 두 번 재판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Double Jeopardy) 원칙을 깬 초법적인 형태라고 꼬집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부관참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법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묵시적 청탁’을 이유로 이 부회장에게 선고를 내린 대목도 미국인 변호사에게는 ‘듣보잡’이다.
법원이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 법적 논증에 눈을 감고 ‘대중에 호소하는 오류(fallacy of argumentum ad populum)’에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다.
아마 미국인 친구는 한국 근대 정치사에서 기업 총수가 청와대로 불려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당시 정권에 돈을 적게 낸 후 ‘괘씸죄’로 1985년 그룹이 공중분해 된 것을 목도한 대한민국 재계 총수들은 튀지 않고 안전하게 가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 최선책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정부가 기업에 대한 각종 인허가, 세무조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등 서슬 퍼런 칼자루를 휘두르는 데 이에 맞서 싸울 기업이 과연 있겠는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은 한국에는 없다.
막스 베버의 ‘합리성의 강철 새장(Iron cage of rationality)’처럼 한국 사회는 합리성을 좁은 새장에 가뒀다. 합리성이 운신의 폭을 넓히지 못하면 그 사회는 퇴화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문재인 대통령이 ‘K방역 성공’을 한 손에 쥐고 ‘경제 회복’을 나머지 한 손에 움켜쥐려면 대기업의 투자와 고용 창출을 이끌어 내는 게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1등으로 우뚝 선 기업 총수가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부(富)를 늘리는 첨병 역할을 하지 못하고 좁은 철장에 갇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손학규 전(前) 바른미래당 대표와 부산 지자체 군수가 이 부회장 사면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 대통령 역시 사면에 대한 원칙과 고민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좌고우면만 할 상황이 아니다.
국민통합을 외치면서 “공약이기에 안 된다”는 명분에 기업인만 사면 대상에서 제외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사면 혜택을 받은 기업 총수가 새롭게 주어진 재기의 기회를 소중히 살려 본인은 물론 국가 경제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면 된다. 여기에 바로 사면제도의 존재 이유가 있다.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 사면을 결정하면 경제 회생을 위한 문 대통령 용단에 대다수 국민이 박수를 칠 것이다.
사회정의, 사법정의는 숭고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따른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 앞에서는 한가롭게 들린다.
김민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gentlemin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