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는데 도로변 화단에 왕원추리꽃이 만개해 있었다. 옛날엔 양반집 후원에서 아녀자들의 근심을 잊게 해주어 망우초로 불렸다는 원추리꽃을 보니 간밤의 근심이 단숨에 씻겨나가는 듯하다. 녹음 짙은 나무 그늘에 앉아 느긋하게 점점홍(點點紅)으로 피어나는 꽃들을 완상하는 여유로움에야 비할 바는 못 되어도 대로변의 한 떨기 원추리꽃이 건네는 위로가 결코 적지 않다. 이처럼 꽃은 어디에 피어 있어도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다.
칼럼을 쓰다 무심코 달력을 보니 오늘이 바로 단오(음력 5월 5일)이다.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고 하는 단오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다. 모내기라는 한 해 농사의 중요한 일정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며 흥겹게 놀이도 하고,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날이 바로 단오였다. 단오를 표현한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시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이 있다.
풍정(風情)이란 '정서와 회포를 자아내는 풍치나 경치'를 이르는 말이다. 혜원의 단오풍정은 제목처럼 단오의 정서와 풍속을 그림 한 장에 오롯이 담아냈다. 그네를 타는 여인과 머리를 풀고 쉬고 있는 큰 타래 머리의 여인들,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반라의 여인들과 이를 바위 뒤에 숨어 은밀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동자승까지 단옷날의 풍속과 풍류의 멋과 운치를 실감이 나게 표현한 걸작이다.
단옷날엔 창포 뿌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창포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검어지고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창포 뿌리엔 향기를 내는 물질이 포함된 걸 보면 옛사람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많은 사람이 꽃창포를 그냥 창포라고 부르지만, 천남성과에 속하는 창포는 물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붓꽃과인 꽃창포와는 식물학적으로나 용도상으로도 전혀 다른 식물이다. 창포꽃은 관상용인 꽃창포의 화려한 자태와는 달리 초여름에 작은 황록색의 꽃들이 꽃자루도 없이 손가락 길이만 하게 다닥다닥 붙어 꽃차례를 이루며 달린다. 창포는 식물체 전체에 향이 있어서 잎을 비벼보면 그 향을 느낄 수 있다. 욕실용 향수, 입욕제, 화장품, 비누 등으로 상품화되기도 하고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류머티즘으로 인한 통증을 다스리는 데에 처방하기도 한다.
이처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서도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하고 마음에 위로를 얻던 옛사람들과는 달리 개발이란 명목 하에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파괴한 대가를 코로나19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한 칼럼에서 "숲으로 나는 길은 언제나 파멸로 이른다"고 자연 파괴에 대해 경고를 하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가 곧 자연 파괴의 역사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해도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모으는 게 무엇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