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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산행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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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산행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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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창을 열 때마다 바라보이는 도봉산이 나를 유혹한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은 풍경이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아 쪽빛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자운봉의 흰 이마가 한층 가까이 느껴지면 불쑥 산을 오르고 싶어진다. 딱히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 숲에 들어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고 싶어진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아침 일찍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꽃을 보는 일이 그렇듯이 망설이다가 지금을 그냥 흘려보내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란 걸 알기에 조급해진 마음이 내 등을 떠민 것이다.

가로변의 벚나무엔 벌써 하나 둘 물든 이파리가 눈에 띄고 은행나무 아래를 지날 땐 떨어진 열매들이 행인들의 발길에 으깨어져 퀴퀴한 고랑내를 풍겨댄다. 멀리서 바라보면 초록 일색으로 보이는 산 빛이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미묘한 변화가 읽혀진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초록은 한결 탁해졌고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던 나뭇잎들도 한결 꺼칠해진 느낌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가을 산행은 보약 세 첩을 먹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을 오르며 충분히 햇볕을 쬐고 땀을 흘리며 숲속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키면 그보다 좋은 보약이 어디 있으랴. 등산로 입구에서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천천히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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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의 햇살은 감미롭다. ‘며느리는 봄볕에 내 보내고, 딸은 가을볕에 내보낸다.’는 속담이 있듯이 가을볕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더군다나 숲길을 걸으며 받는 햇살은 숲의 나무들이 받아서 간접적으로 비치는 것이어서 피부에도 해롭지 않다. 오랜만의 산행이라서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금세 숨이 가빠온다. 다행인 것은 자주 눈에 띄는 붉은 열매들이 나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바람에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하는 것이다. 붉은 색이라도 선홍에서 흑색에 가까운 짙은 붉은 색까지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열매들이 나의 발걸음을 자꾸만 멈춰 세운다. 햇살을 받아 선홍색으로 빛나는 주목 열매, 반지 속 흑진주 같은 누리장나무 열매, 꽃보다 열매가 더 예쁜 참회나무 열매….

정상에 가까울수록 자주 주저앉는다. 어느새 등줄기엔 땀이 흐르고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점점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산을 오르는 일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스로 오르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 내가 걸어간 만큼이 나의 인생이란 걸 깨닫게 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두어 시간의 산행 끝에 어렵사리 정상에 올랐다. 늘 바라보기만 했을 뿐 정상에 오른 것은 2년 만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하다.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시내를 굽어보니 코로나19로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고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마음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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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는 온갖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어느 하나 잘난 척 하지 않는다. 키 큰 나무는 키 큰 나무대로, 그 아래 작은 나무는 그 나름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며 숲을 이룬다. 그래서 숲의 변화는 급작스럽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기 때문에 생태계를 해치는 일이 없다. 이제 머지않아 숲의 나무들은 초록을 버리고 색색의 단풍으로 물든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추운 겨울을 잘 건너가려는 나무의 몸짓이다.

삶에 지치거나 피곤하다면 산을 찾아 숲의 기운을 받아볼 일이다. 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삶에 지칠 때면 숲으로 가서 나무를 품에 안고 나무의 기를 받아 활력을 되찾는다고 한다. 누구라도 숲을 찾아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골라 품에 안고 그 기운을 온몸으로 받고나면 이 가을을 무탈하게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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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