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달력을 떼어내며 “세월이여/발자국을 먼저 찍어 놓다니!”라고 탄식한 함민복 시인의 ‘달력’이란 시를 입속에 넣고 웅얼거려 본다.
굳이 먼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문밖만 나서면 온통 단풍 세상이다. 달큰한 달고나 향기를 은은하게 흘리며 노랗게 물들어 가는 계수나무를 시작으로 세상의 활엽수들이 저마다의 숨겨두었던 색들을 드러내며 세상을 색의 축제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로변의 은행나무 잎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벚나무 잎은 벚나무 잎대로, 느티나무 잎은 느티나무 잎대로 나무와 함께 살았던 날들이 행복했음을 저만의 색으로 증명을 하는 것만 같다. 사람들은 화려한 단풍을 보며 환호하지만 나무들이 단풍이 든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추운 겨울을 건너갈 준비를 하는 비장한 순간이다.
신록의 봄을 지나 초록으로 무성했던 여름은 나무가 자라서 꽃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양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것은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생장을 멈추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낙엽을 떨구어 몸집을 줄이고 단출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초록의 숲은 우리를 편안히 쉬게 하지만 단풍으로 물들기 전엔 나뭇잎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가운 햇살도 먼저 받고 차가운 빗줄기와 세찬 바람에 제일 많이 시달리는 것도 나뭇잎이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찾아오고, 열매가 익으면 새나 짐승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나뭇잎은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수행하며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만든다. 누가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저 혼자 푸르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가을에 가장 화려하게, 눈부시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들과 달리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찬란한 색의 단풍으로 타오르는 나뭇잎을 보면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나뭇잎은 많은 시인에게 깨달음을 주고 영감을 주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의 시 ‘가을 엽서’ 전문>
나는 자연이란 말을 좋아한다.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존재다. 무언가를 의도하거나 조장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움의 기본이다. 여름은 더워야 성장이 자연스럽고, 가을은 쌀쌀해야 단풍이 자연스럽고, 겨울이 혹독해야 오는 봄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한 번 뿌리를 내리면 그 자리에서 일생을 마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며 늘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어느 환경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자기 그늘에서 쉬지 못한다”라고. 낙엽이 지기 전에 단풍나무 숲길을 거닐며 자연이 주는 감동으로 가슴을 물들여보자.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