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했던 어제와 달리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맞은 나무들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연신 잎을 떨구고, 바닥에 내려앉은 낙엽들은 서로 몸을 포갠 채 내리는 찬비를 맞고 있다. 이 비 그치고 나면 곧 겨울이 들이닥칠 것이다.
며칠 전 강원도 영월로 물매화를 보러 다녀왔다. 겨울이 닥치기 전에 떠난 마지막 가을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자장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의 공간 이동은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지고, 두려운 만큼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단종의 비애가 서려 있는 청령포와 장릉을 둘러보고 물매화가 있다는 물무리골 습지를 찾았다. 장릉 옆에 있는 물무리골 생태습지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내륙습지로 영월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국가지질공원이기도 한 이곳은 해발 400m의 고원에 위치하여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가 있는 생태학습장이기도 하다.
‘봄꽃, 가을 단풍’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가을에도 수많은 꽃이 피어난다. 가을꽃의 대표 격인 국화 종류를 비롯하여 과남풀, 용담과의 용담, 미나리아재비과의 투구꽃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여쁜 꽃들이 다투듯 피어난다. 그중에도 물매화는 가을에 볼 수 있는 가장 기품 있고 예쁜 꽃이다. 범의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물매화는 꽃 모양이 매화를 닮았을 뿐 봄날 매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무에 피는 매화와 구분하기 위해선지 몰라도 풀매화, 물매화풀, 매화초라고도 한다. 주로 산지의 볕이 잘 드는 습지에서 자라는데, 줄기는 3~4개가 뭉쳐나며 줄기는 곧게 서고, 키는 기껏해야 40㎝를 넘지 않는다. 꽃은 흰색으로 줄기 끝에 하나씩 하늘을 향해 핀다. 하얀 별 모양의 꽃잎에 짙은 립스틱을 칠한 것 같은 암술이 매혹적인 꽃이다.
야생화 도감엔 7월에서 9월까지가 개화 시기로 적혀 있어 물매화를 만나기엔 조금 철이 지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유심히 주변을 살피는데 좀처럼 물매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잎이 지고 붉은 열매만 주렁주렁 매단 백당나무와 곱게 물든 작은 잎 사이로 선홍색의 열매를 내보이는 화살나무, 개옻나무 단풍이 눈길을 잡아끈다. 그리고 봄꽃의 대명사 중 하나인 개나리꽃을 보았다. 철모르는 꽃이라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신기한 듯 개나리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어디쯤에선가 누군가 물매화를 찾았다. 절정을 지나 끝물이었지만 그래도 몇 송이의 물매화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소곳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먼 여행길에서 만난 가을의 진객을 향해 부지런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대며 우리는 탄성을 연발했다.
올해는 비록 절정을 놓쳤으나 내년에는 때를 맞추어 물매화를 보러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영월을 떠나왔다. 어느 시인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곧 겨울이 닥칠 테지만 다시 봄이 올 것을 믿기에 오는 겨울이 두렵지 않다. 이제 꽃의 시절은 저물어 가지만 자연의 시계는 또다시 우리를 꽃 들판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틀림없이.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