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우에는 외환보유액 잔고가 세계 8위 수준으로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수입규모가 워낙 커 한꺼번에 외화가 빠져나갈 경우 일시적 부족상태가 야기될 수 있는 만큼 미리 보수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국의 외환관리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던 미국,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도 만료된 상황에서 긴축발작이 일어나면 의외로 충격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IMF는 미국에서는 광범위한 임금 인상이 나타나고 지속적인 공급 병목 현상이 나타나 예상보다 빨리 물가가 오르고 있어 금리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 등 긴축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그 강도도 더 세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신흥국들은 잠재적인 경기 충격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IMF의 이 같은 경고는 연준 FOMC가 본격적으로 금리인상과 양적긴축에 나설 경우 2013년의 테이퍼 탠트럼과 같은 후유증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 즉 테이퍼링을 공식화했던 2013년 5월 많은 신흥국들이 긴축발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미국 금리가 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신흥국에 투자했던 돈을 급히 미국으로 옮겼다. 그 결과 신흥국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증시 또한 크게 추락했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미국 연준 FOMC가 3월부터 금리인상에 나서 올해 중에만 모두 4차례 기준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연준 FOMC가 3월과 6월, 9월 그리고 12월에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준의 대차대조표 축소 시작 시기도 12월에서 7월로 앞당겨질 것으로 내다봤다. 골드만삭스의 이같은 전망에 뉴욕증시에는 비상이 걸렸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나스닥 다우지수는 물론 국채금리 환율 비트코인등 암호화폐도 금리인상의 공포에 휩싸인 모습이다.
미국 연준은 앞서 1월5일 공개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의사록에서 "경제, 노동시장, 인플레이션 전망을 고려할 때 앞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일찍 또는 더 빠르게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FOMC에서 일부 참석자들은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한 후 상대적으로 조기에 연준의 대차대조표 규모를 줄이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차대조표 축소가 올해 2분기 전에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런 가운데
IMF는 오는 25일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링니상 오ㅑㅏ 테어필 니퍼링 조기 금리인상과 링니상
하필 벤 버냉키 전 Fed 의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불쑥 테이퍼링을 할 수 있다고 언급했던 게 정확히 8년 전인 지난주 토요일, 즉 5월22일이었습니다. 당시 버냉키 의장은 "경제 전망에 지속적인 개선이 보이고 그것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다음 몇 회의 회의에서 채권 매입의 속도를 한 단계 낮출 수 있다"고 밝혔었습니다.
그 직후 뉴욕 채권 시장에서 2.0% 수준이던 10년물 금리는 넉 달 만인 9월 초 3.0%까지 치솟았었죠.
주식시장은 어땠을까요. 뉴욕 증시의 S&P 500 지수는 2013년 초부터 5월22일까지 무려 16% 올라 1655에서 마감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5개월간은 횡보를 했고 10월8일에야 1655를 다시 찍었습니다. 다만 이후에는 연말까지 다시 12% 상승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32.39%나 급등했었습니다.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바람에 당초 9월 FOMC에서 테이퍼링 시작을 결의하려던 것으로 알려졌던 Fed는 결국 그해 마지막 회의인 12월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2014년 1월부터 매월 자산매입 규모를 850억 달러에서 750억 달러로 줄이기로 한 것이죠. 그렇게 2014년 1월부터 10월까지 1년간 테이퍼링이 이뤄졌습니다. 금리 인상은 2015년 12월에야 이뤄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테이퍼링이 실제 시행된 2014년 당시 금리는 1월 연 3.0%에서 그해 말 연 1.99%까지 오히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뉴욕 증시의 S&P 500 지수도 1월 1800대 초반에서 그해 말 2000을 넘었지요. 연간 수익률이 13.69%에 달했습니다.
경기만 좋고 물가만 낮게 유지된다면 테이퍼링을 해도 금융시장은 괜찮다는 것이죠. 2013년 미국의 GDP 성장률은 연 1.84%였지만 2014년은 2.53%, 2015년은 2.91%에 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기가 회복되는 지,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나올 지 확인하면서 합니다.
월가 관계자는 "S&P 500 지수가 다시 4200을 넘으면서 사상 최고치에 1% 미만으로 다가섰다"며 "중요한 5월 고용지표 발표(6월4일)까지 11일 남았고 원래 월말엔 변동성이 크다는 점에서 시장 상황을 잘 지켜봐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장 막판에 차익실현 매물이 집중적으로 쏟아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출처] 2013년 테이퍼링에서 배우는 교훈|작성자 곰배령도사
"글로벌 금융위기의 또 다른 교훈은 너무 빨리 출구를 모색하지 않고 신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시장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한 연설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행한 양적완화 정책이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며 아직 '출구'를 논할 때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바로 전날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너무 이르게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을 내비쳐서는 안된다"고 발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 수장들이 잇따라 이같이 발언한 이유는 '테이퍼 텐트럼(taper tantrum·긴축 발작)'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최근 유동성에 따른 물가 급등 우려가 커지자 곳곳에서 이르면 연내 양적완화를 축소할 가능성이 제기 되어왔기 때문이다. 양적완화 정책과 물가, 테이퍼 텐트럼의 연결성을 알려면 '테이퍼링'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한다.
16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테이퍼링은 금융시장에서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축소해나간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는 마라톤이나 수영 등 지구력이 필요한 운동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훈련량을 줄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스포츠 용어였는데, 2013년 5월 벤 버냉키 Fed 의장이 의회 증언 당시 이 단어를 양적완화 축소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금융시장에 적용됐다.
테이퍼 텐트럼은 이러한 테이퍼링이 시장에 충격이 돼 투자자들이 갑작스럽게 자금을 회수, 신흥국 통화가치나 증시가 급락하는 형태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시중에 유동성을 풀고난 이후 물가가 급등하게 되면 이를 낮추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 채권매입 규모 축소 등으로 다시 유동성을 거둬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승세를 보여왔던 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라 우려한 투자자들은 위험회피 심리가 강화되고 리스크가 높은 신흥국에서 자금을 급격하게 뺀다. 여기서 발생한 충격을 테이퍼 텐트럼이라고 한다.
현 중앙은행 총재들이 기억하는 테이퍼 텐트럼은 불과 8년 전인 2013년 5월 버냉키 당시 Fed 의장의 발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을 살리기 위해 Fed가 유동성을 공급, 자산 매입 등 양적완화 정책을 유지해오던 때였고 이로 인해 Fed의 총 자산은 2008년 1조달러 수준에서 2013년 3조달러 수준으로 크게 늘어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는 크게 살아났고 이를 본 버냉키 의장은 "향후 몇몇 회의에서 자산 매입 속도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에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흔들렸다. 투자자들은 Fed가 공급하는 유동성 없이는 경제가 침체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Fed의 자산 매입 축소 가능성에 미 국채 금리는 급등했고 신흥국까지 흘러 들었던 자금이 급격히 회수되면서 신흥국 주가와 통화가치는 급락했다. 특히 외환보유액이 부족했던 인도와 인도네시아, 터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취약 5개국은 외환위기 우려까지 나올 정도였다.
Fed의 현재 자산 규모는 7조달러에 달한다.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타격을 막기 위해 자산을 빠르게 대량으로 매입해온 만큼 시장에는 자금이 대량으로 풀려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백신 보급에도 아직까지 방역을 위한 봉쇄 조치 등이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어 이에 따른 '더블딥' 우려도 여전하다. 세계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양적완화 축소 메시지가 나올 경우 2013년보다 더 큰 충격이 올 수 있다는 것이 파월 의장과 라가르드 총재의 발언이 나온 배경인 것이다.
파월 의장은 시장과의 소통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양적완화 정책을 축소할 때가 되면 "온 세상이 알게 할 것"이라면서 "자산 매입의 점진적 축소 시작을 고려하기 한참 전 대중과 매우 분명하게 소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마스 바킨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6~7년 전 경험으로 우리는 분명 배운 것이 있다. 당시 파월은 Fed에 있었다"면서 "소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
가열되고 있는 미국 경제가 자본 이탈을 촉발해 신흥국 경제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일 보도했다.
지난 2013년에 발생한 테이퍼 탠트럼(긴축발작)으로 신흥국 경제가 불안해지는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3월 개발도상국의 자본유출 규모는 51억6천만 달러(5조8천억 원)에 달했다. 자본유출이 나타난 것은 지난 10월 이후 처음이다.
WSJ은 바이든 행정부가 1조9천억 달러 규모의 부양책과 신속한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내놓은 이후 미국 경제 회복 기대감이 대폭 커지면서 자본유출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현재 이코노미스트들은 올해 미국 경제가 6.5% 성장해 30여년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기 회복 기대감에 미국 국채금리는 올해 들어 가파르게 상승했고, 경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이어질 경우 신흥국에서 자금이 이탈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미국 경기 회복 속도가 빨라지면 금리가 급격히 오를 수 있으며, 이는 금융여건 긴축과 신흥국·개발도상국의 대규모 자본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상승과 통화가치 하락을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한 터키에서는 지난 2015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자본유출이 발생했다.
터키의 나지 아발 중앙은행 총재는 작년 11월 취임 당시 10.25%였던 기준금리를 19%까지 끌어올렸고, 결국 레제프 타이이프 에로도안 대통령의 불만을 사 지난달 해임됐다. 이는 터키화 급변동과 자본유출을 더욱 자극했다.
WSJ은 이와 같은 신흥국의 금리 인상은 '테이퍼 탠트럼'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 의장은 경제가 금융위기 그늘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자 국채 매입을 줄일 가능성을 내비쳤고, 공포에 휩싸인 투자자들은 미국 국채를 내던졌다. 이 여파로 미국 국채금리가 급등해 신흥시장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많은 신흥국이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했고 이 여파로 경제는 다시 둔화했다.
WSJ은 "만약 그들이 올해 다시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한다면(신흥국이 금리를 인상한다면) 팬데믹으로 약해진 경기 회복세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직 연준이 버냉키와 같은 완화 되돌림 가능성을 내비치진 않고 있지만, 지속적인 미국 경제 회복과 이에 따른 연준 긴축 전망 고조, 미국 국채금리 상승이 테이퍼 탠트럼과 유사한 상황을 촉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다만 대부분의 이코노미스트는 테이퍼 탠트럼 재발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고 WSJ은 전했다.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으로 대규모의 자금이 유입됐으나 현재는 이와 같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체는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에 유입된 자본은 전체 글로벌 자금 흐름의 약 50%를 차지했지만, 이번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는 큰 유입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유입된 자금이 크지 않은 만큼 이탈될 자금도 많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국 연준이 테이퍼링의 속도를 높이고 금리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를 공언하면서 긴축발작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급격한 외국자본 이탈로 신흥국에서는 외환부족에 의한 디폴트나 국가부도의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 양적축소 긴축발작의 와중에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할까? 국가의 디폴트나 부도는 외환보유액부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10일 현재 4631억200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절대 액은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다.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를 직접 찍어내고 있는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9번째로 많다. 지금 당장 긴축발작이 터져 외화가 빠져나간다 해도 일단은 방어할 수 있는 규모이다.
우리나라가 국가부도상태에 빠져 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1997년 당시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였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의 외환보유액은 100배 이상 많다. 그동안의 달러 인플레를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외환보유액 상황은 상당히 여유가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보다 외환보유액이 더 많은 나라는 중국, 일본, 스위스, 인도, 러시아, 대만,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정도이다.
한 가지 감안할 것은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가 이들 나라보다 현격하게 높다는 사실이다. 무역의존도는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총량을 국내총생산 즉 GDP로 나눈 것이다.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100% 내외로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본의 해외의존도도 높다.
긴축발작과 같은 유사시에 수출 대금이 제때 안 들어오면 외환보유액으로 빠져나가는 외환의 수요와 수입대금을 지불할 수 있어야 외환위기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간 수입물량은 5000억 달러 선이다. 여기에 자본이탈에 따른 외화지급 수요까지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외한보유액은 결코 액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흘러넘치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해 통화스와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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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을 자산별로 나눠보면 국채·회사채 등 유가증권(4천216억9천만달러)은 한 달 전보다 7억5천만달러 불었고, 특별인출권(SDR·153억7천만달러)도 2천만달러 증가했다.
하지만 예치금(166억3천만달러)은 15억6천만달러나 감소했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대한 교환성 통화 인출 권리인 'IMF 포지션'(46억3천만달러)은 11월말과 같았다.
금도 시세를 반영하지 않고 매입 당시 가격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전월과 같은 47억9천만달러로 집계됐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11월말 기준으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중국(3조2천224억달러)이 가장 많고, 일본(1조4천58억달러)과 스위스(1조826억달러)가 뒤를 이었다.
1997년부터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외환 유동성 위기를 통칭하는 말.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김영삼 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동남아시아에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이를 1997 아시아 금융 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으로 불리우며,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위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8] 한국은 단순 지표상으로 앞의 두 국가보다는 덜했으나 역시 엄청난 위기를 겪었다. 홍콩,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몽골, 캄보디아, 마카오 등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향을 덜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아시아 유일한 선진국인 일본에도 영향을 준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하게 큰 사건이다.[9]
일본은 이미 침체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향은 아주 크지 않았지만 1995년을 기점으로 점차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소비세를 5%로 인상하면서 소비 심리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확 꺾여버리고 말았다. 결국, 일본은 1998년도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잃어버린 10년 초-중기 기간 동안 미약하게 증가했던 실질 임금과 가처분 소득도 1997년에 고점을 찍고 하락세로 들어서게 하는 경기 침체를 연장하는 요소를 겪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금융 위기는 경기 불황에서 다시 일어서려던 일본을 끌어내리는 데 한 몫했다는 점에서 여파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장기간의 불황이 넷 우익, 일본의 우경화의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국내기업의 외국자본 단기부채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발생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한국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는데, 해당 문서는 이를 상환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IMF는 1997년 말에 발생하여 2001년 8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에도 'IMF 사태 이후로 힘든 시기'나 'IMF보다 힘든 시기'같은 표현으로 경제적 고난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외환 위기 직전이 호황으로 여겨졌지만, 위기 조짐은 전년인 1996년도부터 보였다. 1996년도의 경제성장률이 1995년도의 9.6%에서 7.9%로 떨어졌던 것이 그 단초였고, 언론에서는 경기 침체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었다. 즉, 이미 그 전부터 불황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경제성장률 7% 정도면 전혀 낮지 않은 평균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기에, 경기 침체로 경고했던 언론의 부채질은 호들갑 수준이라고 봐도 되었다. 1994년과 1995년도의 경제성장률이 9%대를 잇따라 기록할 정도로 활황이었기에 성장률이 떨어진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10] 문제는 이번에는 성장률 감소가 수출액 감소, 대외 채무 폭증 등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구조 개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과 은행마저도 나날이 무너지며, 대규모 실업 - 대량의 부동산 매각 - 금융불안 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외환 위기 상황으로 확실화된 이후에야 IMF의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인 경제적 체질 개선과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이는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경제위기 사태이다. 대한민국의 GDP와 1인당 GDP는 사태 직전까지 감소한 적이 없었으며, 국가에서 경제위기 상황을 인정한 적도 없었다. 오일 쇼크때 잠시 경제가 안 좋아진 적이 있었지만, 경제에 심한 타격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며, 진짜 경제위기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하면 이 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린다. 또한 국민들의 경제에 대한 믿음도 완전히 바꿔 놓았는데, 한 예로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도 사실 외환위기 이전의 경직된 노동시장에서나 통했던 말이 되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용 시장이 불안정해진 이래 대한민국 사회는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국제정치사를 살펴보면 아시아 금융위기(1997년 외환 위기)가 중국이라는 잠자는 용을 일어나게끔 만들고 미국이 중국을 경계하는 계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11] 결국 미중 패권 경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도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2008 ~ 2010년대 대침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12]
2. 당시 상황[편집]
IMF 국가신용등급 변화
국가신용등급 변화
구분(전기대비)
1997년 3분기
1997년 4분기
1998년 1분기
1998년 2분기
1998년 3분기
1998년 4분기
민간소비(C)
+1.0%
-1.0%
-13.6%
+0.2%
+2.1%
+2.3%
설비투자(I1)
-8.7%
-14.6%
-24.8%
-10.1%
+1.0%
+7.7%
건설투자(I2)
+3.9%
+0.7%
-9.7%
-6.5%
-2.9%
-0.7%
경제성장률(지출부문)
+0.8%
-0.6%
-7.0%
-0.6%
+1.5%
+2.3%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ECOS에 나와있는 외환위기 시절 경제성장률 지출 부문. 정부지출은 빠져있다. 참고로 이것은 표에도 나와있지만 전년 대비가 아니라 전기 대비다. 기업 설비투자는 1997년 2분기 대비 1998년 2분기, 즉 1년 연간 대비로 하면 -47.3%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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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불과 몇달 전인 1997년 3월 8일과 9월 18일 조선일보 지면에 나온 기사.
그 외에도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비슷한 기사를 냈다. (3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단독 인터뷰였으므로 타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다.)
단, 인터넷 커뮤니티들에는 위와 같은 기사 캡쳐들이 마치 한국 언론사들이 외환위기 직전까지도 한국은 안전하다고 선동을 했다는 식으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저 기사는 IMF 총재와 IMF측 인터뷰를 그대로 보도한 것일 뿐이며 언론사들이 선동한 것이 아니다. 1997년 9월경 IMF뿐만 아니라 BIS, OECD, 세계은행 등의 수장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동일한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 역시 다수의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었다. 특정 의도를 가지고 듣보 인물을 전문가랍시고 인터뷰해서 보도하는 것도 아니고 IMF나 세계은행 등이 그렇다는데 그 내용을 보도를 안하는게 더 이상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언론사들의 농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조선일보도 외환 위기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의 기사를 다수 보도한 바 있고(# # #) 1997년 당시 기사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그해 동안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외환위기 위험을 우려하는 보도들을 수두룩하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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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998년, 1999년의 뉴스.[13]
이 모든 뉴스가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것이다. 출처는 1997년과 1998년의 MBC 뉴스데스크. 출연자는 당시 평일 앵커인 이인용/김지은-정혜정, 주말 앵커인 권재홍/최율미. 단 대우그룹 부도는 1999년이다. 그 밖에 위의 스크린샷에서 언급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에 회생되었거나 부도를 당하지 않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이름까지 바뀌기도 하였다.
IMF사태
▲ 2017년과 비교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재벌들의 생존현황. 재계순위 30대 기업 중 11개 기업이 싸그리 갈려나갔다. 해당 이미지상 분할 없이 온전히 98년도와 17년도 모두 30위권을 유지한 그룹은 삼성, SK, 한화, 롯데, 대림그룹, 두산, 효성그룹 으로 7개라 반토막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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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듯한 환율 폭등으로 절망감에 빠진 외환 딜러들의 모습.
경제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저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쉽게 알 것이다. 저 사진에 나온 딜러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준다.[14] 혹시 환율이 높으니 수출하기 좋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기업들이 도산하던 시점이라 수출할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고 많은 외채로 인해 많은 달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팔 물건이 없는데 환율 높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이 덕분에 경제가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 쯤인 1998~99년에 수출경쟁력이 급상승하여 수출액이 반등할수 있었지만 이는 기저효과에 불과했다.
3. 경과[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1997년 외환 위기/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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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눈앞의 위기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1997년 12월 1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
"기아자동차와 진로, 한보, 대우 등 천문학적인 부채 위에 세워진 이른바 한국의 재벌 기업이 문제의 시작점이었다. 10대 재벌의 부채 비율은 500%를 웃돌았다. 상상하기 힘든 수치였다. 이들 재벌이 부채상환 불능상태에 이르면서, 11월이면 은행까지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질 위기였다.
윌리엄 로즈 전 시티은행 부행장. 1997년 11월 국제채권위원단 의장 신분으로 방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달러$)는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IMF에다 "시키는 대로 할테니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2008년 그리스 경제위기 같은 수준의 엄청난 재난이다. 그냥 돈을 빌려주고 제때 이자를 쳐서 받으면 그만인데, 돈을 빌려주는 대신 명령대로 나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IMF가 비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즉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전이었던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1996년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 그러나 1996년의 무역 적자는 무려 230억 달러에 달하며 외채는 1,000억 달러를 뛰어넘는 등, 이미 대내외적으로 장기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상당수의 한국 경제학자들은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급급했다. 즉,현실 인식을 완전히 반대로 했다. 불과 몇년전 일본에서도 곧 있으면 미국을 능가할것이라며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결국 외환 보유액 부족과 여러 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이후의, 그리고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3.1.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편집]
아시아 금융위기
먼저 배경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아시아 전체에 일어난 대형사태였다. 1997년 여름 태국부터 시작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부터 번진 외환 위기 는 같은 해 가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했고, 직접적인 경제 위기까지는 아니었던 중국과 일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태국은 1995년부터 자국 통화가 위기에 빠질 때 중앙은행 간에 서로 도와주기로 한다는 쌍무협정을 주변 국가들과 체결해 놓고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사들의 투자성 환율공격이 이를 연쇄적으로 터트린 것. 그런데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동남아 지역의 투자가 증가하면서 일시적인 반사 이익을 좀 받긴 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 위기로 동아시아 경제 블록 내에서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다. 쉽게 말해 미국산 대신 중국산을 선택하는 거래처가 많아진 것.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총체적으로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고 칭한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대만이 그 뒤를 쫓아 치고 오르고 있었고, 그것을 본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까지 그에 따라 하기 시작한 이른바 안행 효과(雁行效果)가 일단 세계적 흐름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버블 붕괴까지 시작되며 '3저호황'으로 경제 성장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기본적으로 당시 수출 주도형 국가들의 시스템은 자기 자본이 없는 국가지만 외국 자본을 많이 도입함으로써 자국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해[15] 그 반사 이익으로 수출의 증대,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을 통한 기술력 증대, 하여 결과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잘 굴러가게 되면 자국의 자본이 적더라도 외국 자본을 통해 외국의 설비를 들여와 자국의 생산 기술을 올리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기초과학과 기본기술을 올려 생산설비의 자체제작도 노려볼 수 있는 괜찮은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미 그렇게 성장해 온 나라로서 싱가포르와 한국, 대만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아주 좋은 케이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보통 여기에 홍콩도 포함이 되나, 홍콩은 제조업이 아닌 금융업이 성장을 주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수출의 증대 를 통해 자국의 국가경쟁력이 강화 되면 자국의 화폐가 평가절상[16]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 적자 상황이 나기 때문에 환율조작을 통해 다시 강제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시켜야만 다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기업고정자본형성이라는 고정투자로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경상수지와 경제성장률을 높이게 만들었다. 다만 이원복 교수는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선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 외환위기를 피한 이유를 중국인의 국민성에서 찾았는데, 이 세 나라의 주류민족인 화교들은 특유의 철저한 저축정신으로 일관하여 외화까지 차근차근 모아다가 외환위기를 극복해냈으며 특히 대만은 1997년 기준 외환보유고가 835억 달러였다. 그러나 이들도 글로벌화에 둔감하다 보니 외환위기를 당할 조짐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3.2. 한국은 괜찮을까?[편집]
하지만, 한국은 1996년에 GDP의 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맞았고, 정부는 사치성 수입재가 경상수지 적자의 원인이라고 해명하며, 투자로 수출을 늘려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한다.
게다가 1997년 1월 미국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 내수가 일시 축소되는 동시에 미국의 대외수입이 감소하며 한국을 비롯한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수출을 할 시장의 규모가 감소했다.
이로 인해 생산된 물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은 고사하고, 투자나 융자로 외국자본을 유치한 국가들은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일부 큰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을 감당해야 하고 + 갚아야 할 돈이 늘어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 특히 수출을 늘리고자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 시키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더더욱 늘어나는 악재까지 나타나는 등 대형 악재가 연이어 터진 것이다.
화폐의 평가절하를 못 하게 되자 기업들은 경상수지 악화를 견뎌야 했고, 일시적인 수출량 부재에 이어 전에 계약해 둔 수입 물품으로 인해 유동자금 경색이 시작되자 재고품을 덤핑 판매하여 자금을 수혈했으며, 최후의 보루로 단기부채를 끌어오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 자동차 덤핑 대미 수출로 미국의 반덤핑 무역 제재법인 슈퍼 301조 조치를 받았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 측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리며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인 300억 달러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53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확인되었다.[17] 건물의 기둥이 균열나면 건물자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폭삭 내려앉는것과 같다. 돈을 신용, 즉 적정 한도 이상으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자세한 것은 이 기사를 참고.
한국은행이 97년 3월 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으며,
역시 97년 3월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위기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책강구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강경식 전 경제부장관이 이 보고서가 시중에 유포되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라, 강경식 장관이 홍콩 출장 중일 때 전국에 배포했는데, 강 장관이 이를 알고 홍콩에서 대노, 재정경제원에서 해당 보고서를 다시 회수하는 일이 있었다.
※ 3년 후 강경식 전 경제부장관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자 한나라당 입당을 시도했으나, 외환위기와 이 보고서 회수건이 빌미가 되어 무산된다.[18]
3.3. 50만$까지는 묻지 않겠다[편집]
사실 정부에서도 마냥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뒤늦게나마 금융개혁법을 발표하는 한편, 중반기인 7월 무렵에는 기존 1만 달러였던 "(非사업자) 개인의 외환보유 한도를 50만 달러까지 확대하고, 출처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취지의 시행법령을 발표한 것이다. 즉 어떤 경로로든지 좋으니 1인당 50만 불까지는 양지로 꺼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19]
이런 노력 끝에 300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으나...
3.4. 장애물에 직면하다[편집]
1990년대 중반부터 위기 바로 전년도 까지만해도 선진국으로부터 기간은 12개월 이내의 단기면서 이율은 저이율인 외채를 끌어들여 롤오버로 연장해 가면서 그 돈을 다시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에 장기 고이율로 대주는 방식으로 따로 드는 돈도 필요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돈을 쓸어 담으며 떼돈을 벌었던 종합금융회사(약칭 종금사)들과 OECD에 29번째로 가입해 선진국 클럽에 합류한 한국의 위상 문제, 그리고 12월에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가 발목을 잡게 된다.
90년대에 들어 무려 30여 개로 난립한 종금사들이 일본 등지에서 1년 이하 단기 외채로 끌어들인 돈을 다시 장기채권으로 빌려주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불량채권이 늘어나게 되었고 + 미국의 금리인상 여파로[20] 아시아 국가들에 투자된 자금 일부가 다시 미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한국의 종금사들도 12월, 1 ~ 2월인 채권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96년 BIS 자기자본비율의 도입으로 일본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부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94년에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하고, 95년에는 마침내 선진국의 기준처럼 여겨진 국민소득 10,000달러까지 도달한 문민정부의 경제성과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게다가 96년 총선의 압승으로 여권 단독 표결로 통과시킬 수 있는 각종 개혁 입법들 마저도, 정권 말 지지도가 급락한 YS와 거리를 두려는 여당의원들의 비협조로 통과하지 못하였다. 표결에 다수가 불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으나,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다시 끌어올리지 못하고 무디스 등지의 신용평가회사들의 평점은 계속 하락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 이 와중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 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전이었다.
3.5. 구원투수의 구원 거절[편집]
1997년 9월이 되자 외환보유액 부족이 본격적으로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불태화 정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및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한테 긴급하게 한국한테 외환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도 하필이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 Top 3인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하고,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이던 홋카이도 탁쇼쿠 은행이 파산하는 등 제발 저리는 상황이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수상이 경황이 없어서[21] 김영삼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마쓰시타 야스오 총재는 일본은행이 매입했던 한국 정부의 외평채 50억 미국 달러에 대해, "외평채를 발행하던 시점[22]의 한국 신용도에 비해 현재 한국 신용도가 떨어져 외평채에 손해가 발생하므로, 한국 정부한테 외평채 조기 상환(콜옵션 행사)을 요구했다.
미국은 상황이 복잡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 상황이 심각하므로 150억 달러 수준의 긴급 차관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시점에 한국과 미국이 미국산 쇠고기 및 한국 자동차 건으로 통상 분쟁을 빚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에서 O-157 대장균이 검출됐다는 사실을 언론에 터뜨리면서 상황이 결정적으로 꼬였다. 한국의 자폭 O-157 대장균 검출 사실이 공개되자 분노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23]과 윌리엄 M. 데일리 상무장관, 앨 고어 부통령[24]이 한국 지원에 대해 결사 반대 및 슈퍼 301조 적용을 통한 미국 협상력의 우위 확보를 주장하면서 "한국을 절대 지원하면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미국 내각 내부에서 수많은 논쟁 끝에, 고어 부통령과 루빈 재무장관이 이겼다. 1997년 10월 2일 미국 정부는 슈퍼 301조를 한국에 발동시켜 "한국의 모든 대 미국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10월 13일 수많은 격론 끝에 로버트 루빈과 앨 고어의 의견대로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특별 차관 제공을 거부하게 된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1997년 10월의 한국 지원 거부 결정을 하고 나서 미국 재무부 직원들한테 "한국은 이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루빈 장관은 IMF에서 미국이 가진 거부권을 발동해서, "한국의 IMF 관리체제 승인조차 거부"[25]하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3.5.1. 김대중의 IMF 구제금융요청 주장[편집]
그 와중에 1997년 1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IMF의 구제금융요청을 적극 검토해야된다는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고 "구제금융을 받더라도 경제주권이 상실될일은 없을 것"이라며 IMF자금수용에 대해 적극수용의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26] 그리하여 1997년 11월 21일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김대중후보는 "'IMF의 자금지원을 서둘러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했고[27] 결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그들의 경제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후에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1월 18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IMF사태로 인해 외국자본의 무차별 유입이 유려되는점을 질문하자 "미국은 약 17%가 외국 자본입니다.우리나라 는 얼만지 아십니까? 불과 2%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세계로부터 고립 되고 있는 것입니다.이러니까 급해져도 누가 안 도와주는 겁니다."라며 IMF외국자본유입에 대한 우려를 무시했다.[28] 후에 김대중은 미국 부통령 앨 고어와의 말레이시아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철강보조금문제와 쇠고기문제, 지지부진한 한국의 구조조정문제를 앨고어에게 강하게 추궁당하고 질책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29][30][31]
3.6. 둑이 무너지다[편집]
미국의 조기 자금지원[32]으로 국가부도 위기를 넘기고 외채의 만기연장률도 1997년 12월 18일 5.1퍼센트에서 1998년 1월 15일 77.4퍼센트로 급속회복되었으나 외환분야에서 실물분야로 위기가 전염되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량해고가 발생했다.1997년 12월, 사태가 시작된 직후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33] 그러나 98년 1월에 집계된 실업률은 4.7%를 기록하고 1년전보다 3배 많은 3300여 개의 업체가 도산한다. 노동부마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업급여 신청자수가 폭증하였으며#, 임금체불 신고도 급증하였다#.그로부터 1년 후인 1999년 2월, 실업률이 1966년 이후 최고인 8.7%에 달해 전무후무한 경기위축을 실감하게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하락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쳐 취업난은 아직까지도 한국 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다.[34]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 원에 달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 준다.[35]
여담으로 이때 당시 뉴코아나 미도파 등이 부도났는데도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않아 많은 시민들이 평소와 같이 백화점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부도가 났다는 것을 알게되는 상황들도 많았다. 이는 종금사나 증권사도 마찬가지였다.
3.7. IMF 구제금융 신청[편집]
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 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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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IMF 구제금융 요청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1960년대에 시작하여 1980년대~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고도 경제 성장이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그러한 방향에 부실한 지점이 있다는 것까지 의미했다. 당시 MBC 이인용 앵커의 말대로 한국은 전 세계에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함과 동시에 국제기관의 품 안에서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IMF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이 경제 주권을 포기할 정도라는 말이 있듯, IMF가 그냥 무조건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그러나 당시 KBS 보도 중에선 부작용 관련 얘기가 별로 없었다.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경제자체의 신뢰도는 끝장이 났고 IMF의 경제식민지가 된 이상세계의 금융기관들 사이에서 나라경제 신뢰도는 남미의 개도국 아르헨티나 수준으로 끝장났으며, IMF 측에서도 한국이 IMF와 맺은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 강하게 의심했다. 오죽하면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가 12월 13일 미국 PBS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는 금융기관 기업과 근친상간적인 관계"라며 힐난했다.(MBC 보도) 다만 KBS에서는 캉드쉬의 동일 인터뷰를 다루며 "한국은 최악의 위기상황을 벗어났다"는 발언을 강조하여 다른 관점으로 보도했다.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IMF 구제 금융의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그날 밤 10시에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가이트너[36] 미국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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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면 IMF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사실상 경제주권을 IMF에 바친 셈이다.# 이 양해각서가 체결된 12월 3일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시점으로 보는 편이다.
한편 대선주자들 간에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김대중 후보와 국민회의 측은 "우리나라에 지나친 부담이 되는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세부사항에 대한 추가협상을 통해 국민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 "지금의 협약내용대로면 한국 경제가 대량실업 등으로 힘들어질 것"이라며 재협상 혹은 추가협상을 주장하였고[37], 이에대해 이회창후보와 조순 한나라당 총재는 "한국 측이 더 적극적으로 IMF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혀야 경제위기를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다.", "국민회의의 재협상 주장은 정치적 인기발언이다."며 김대중 측을 비판하였다. IMF는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선 후보들로부터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4년간 한국 경제는 IMF의 경제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KBS, 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 이런 관계는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이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서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3.8. 후유증과 복기[편집]
경제위기 이전의 성장 이면이 봇물터지듯 드러나면서 대한민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 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하긴 했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유증이 나타났다.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 이전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시피 했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났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자살률의 급증, 실직한 가정의 붕괴와 이혼 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 문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1992년에는 17.5%였던 것이 19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도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당시에는 웬만해선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당장 일부 인식과 달리 대출의 상당수는 주택 거래나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신용대출이 많다는 통계도 있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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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다만 상당수 대기업들이 호황기를 틈타 투자를 과도하게 했다가, 외환위기가 닥쳐온 후(혹은 닥쳐오기 직전에) 부도된 사례는 꽤 많았다.[38]
하지만 IMF 외환위기의 원인이 과다한 외채 때문이라고 하면 정답이거나 정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자산 시장에 거품이 잔뜩 끼어서 경제 위기가 왔던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부동산 광풍은 3저호황의 영향으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던 노태우 정부때 가장 심각했었고 그래서 집값과 전월세비 상승으로 체감하는 체감되는 경제 성장폭이 그렇게까지 높은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신도시들과 주택 개발지구의 대대적인 분양으로 주택 물량이 쏟아져 나온 데다가, 토지공개념 3법과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완연히 가라앉았고 문민정부 시기 내내 부동산 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1996년에 약간의 반등이 보이기는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던 상황인 데다가 주식시장 또한 94년 11월에 종합주가지수(현 코스피 지수)가 1138P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로 하락기를 겪고 있었다.
4. 원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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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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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편집]
1970년대 석유 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하 주요 국무위원들이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97~98년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영업활동에 나섰다. 1970년대에 석유파동 당시 미국을 방문해 달러화 지원을 요청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태 수습에 한창이었던 1998년에 다시 국무총리를 맡아 김용환과 함께 경제를 조율할 관료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저승사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이 시기에 구원투수로 등판,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1996년 말 기준 평균 387%의 부채율을 평균 200% 이하로 줄이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강제해 재무구조를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투자유치 활동을 겸하여 홈플러스의 모기업인 테스코 사가 이 무렵 한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지일(知日) 인사로 유명한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39] 포항제철 활동 당시 구축한 일본 인맥을 활용해 "단기차관→중장기로 전환"하는 협상을 벌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측에서 약속을 틀어버려 외교문제로 비화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우리나라와의 주요 협상을 앞두고 일본 측에 압력을 넣었다거나, 일본 측 관계자가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는 부연설명까지 포함된 루머가 시중에 돌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은 없는 상태. 문제의 차관 전환은 1999년에 다시 논의되어 성사된다.
한국은행은 1997년 3월 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등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한 건 뿐만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이 김영삼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인지했다고 밝힌 지난해 11월 중순 전까지 모두 23차례나 청와대 총리실 재경원에 심각한 외환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한 것으로 감사원의 기초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폭락한 국내 부동산시장을 떠받치기 위해서 외국자본의 국내 부동산 매수를 크게 허용해 주었고, 재외동포 등 비거주 한인이 국내 부동산을 살 때 제한을 풀고 '고국의 부동산을 사라'며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금 많은 부유층의 미분양 아파트 매수를 권장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한시 면제 등 혜택을 주었다. 이것은 참여정부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데도 그대로 재탕되어서 세제 혜택을 받는 다주택자가 많이 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후예인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더욱 늘리며 규제를 하게 되었다는 것.
2015년 7월, 그리스의 제3차 구제금융시 한국의 IMF 사태와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것은 그리스 경제위기 참조.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대만이 중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통일그룹과 대만도 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어서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베스트셀러인 '화폐전쟁(Currency Wars)'의 저자 쑹훙빙은 1997년 대한민국의 외환위기가 국제 유대 자본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제 유대 자본이 저리 대출을 늘려 한국의 자산버블을 키웠다가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자 갑자기 대출금을 회수하여 한국을 사실상 파산시킨 다음에 한국의 알짜 자산들을 걍 헐값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양털 깎기 문서를 참조할 것.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를 경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스포츠 도박업체 타이거 풀스 사가 한국 내 사업 허가를 조건으로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특히 이 일에 적극 나선 이벤트 사업가 송재빈의 수완으로 타이거 풀스 한국 지사가 설립됐으며, 나중에 시작된 정부의 체육복권사업인 토토의 지분도 사들여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 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현재 송재빈의 지분은 사라진 상태.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가 10년뒤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기용되자, IMF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애초에 김영삼 정부 시기 재정부 장차관은 계속 경질되며 바뀌던 상황이었고, 강만수는 단지 차관이 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IMF사태가 터진 경우라서 그에게 책임을 지라 비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전임들이 만들어 돌리던 폭탄이 강만수가 차관이 되며 터진 격이기 때문.
김영삼 대통령이 "자금 흐름의 투명성"을 높일 목적으로 실시한 정책인 금융실명제를 폐지시키려 한 세력들이, "김영삼의 임기 말"에 슬그머니 정부 관련부처 및 언론 내 인맥을 동원해 금융실명제 폐지 필요성 및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을 내보내 군불을 지피는 한편 + IMF 외환 위기의 원인이라고까지 억지를 쓰기도 하였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일부 부자들이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일도 있었지만,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한 혼란은 "불과 2 ~ 3일만에" 빠르게 수습되었다. 무엇보다 금융실명제의 시행취지(자금흐름 투명성 제고)와 외환 위기를 연관시키려 하는 일 자체가 터무니없는 수준의 무리수이다. 오히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자금세탁을 막았고 탈세가 근절되었기 때문에, 시행 안했으면 당시 한국 경제는 더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IMF의 성향상 경제의 투명성 제고를 높이는 방향을 원하지 반대로 간다는것은 말이 안된다
1997년 정부가 IMF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정확히 18년 되는 2015년 11월 22일, 공교롭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흔히 IMF 혹은 IMF 사태 라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사실 IMF는 구제금융을 해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정확히는 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맞다. 일단은. 여하튼 이런 관계로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항상 IMF 사태라고 부르며 IMF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IMF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준 기관 인데 왜 IMF를 나쁜 것처럼 말하느냐?"라면서 싫어한다고 한다. 허나 상술했듯 현대 한국의 미래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행위[40]들을 강요한게 바로 IMF고 이는 IMF 자신도 시인한 사실이라 IMF의 미셸 캉드쉬 총재와 휴버트 나이스는 한국인들에게 린치당해도 싸다.
경제가 이렇게 안 좋아지자 대학교 재학생들은 경제난을 피하는 방책으로 '에라이 차라리 군대나 가자' 스킬을 대량으로 시전하여 군대 입영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일부 부대는 막사를 긴급히 지어 올리는 등 군대는 한동안 병력 적체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몇몇 재학생들은 한총련 등 운동권 세력에 가담해 'IMF 재협상' 및 '정리해고 저지', '경제청문회 개최' 등을 외쳤지만 국민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서울역, 영등포역 노숙자는 이 때 폭증했다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도시공간 형성 특성 상 그 전에도 있었지만, 1998~2001년 사이에는 서울역앞 광장은 물론 시청 앞으로 나오는 지하도까지 노숙자가 가득했다.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3년 한종해 기자가 일요시사에 연재한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에 따르면, IMF 사태로 망한 재벌들 중 아직도 부를 누리거나, 다른 사업에 손댄 이들도 있다고 한다. 당장 해외로 도피한 한보그룹의 정태수나 대우그룹의 김우중, 쌍용그룹의 김석원, 동아그룹의 최원석, 신동아그룹의 최순영이 그런 케이스.[41]
외환위기 당시에 망할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재벌들이 여럿 있는데, 크라운해태그룹, 한라그룹, 벽산그룹 등이 그런 케이스이다. 크라운제과는 2004년에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해 '크라운해태그룹'으로 발돋움했고, 한라그룹은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대중공업, KCC그룹 같은 친척 회사들의 지원으로 다시 살아났다. 벽산그룹 역시 1998년에 워크아웃을 맞고 채권단 관리를 받다가 2002년에 기존 오너집안이 되찾아왔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부도가 났는데 직종 불문하고 부도사실을 재빨리 알리지않아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백화점 같은 경우 관계자 말에 의하면 많은 시민들이 백화점을 찾아 일에 혼선을 줄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 예로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나오는 갑수는 미도파가 갑자기 문을닫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IMF 외환위기 시대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는 사태가 제일 심각했던 1997년 말 ~ 1998년 사이에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 재학한 1990년~1994년생 이다. 이들은 나라 안팎으로 심각했던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 할 것이며 외환위기로 인해 집안경제가 어려워져 점점 험악해지는[42] 자신의 가정환경 속에서 불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자신의 어린시절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고, 다시는 떠오르기도 싫은 불행한 시기로 1990년대 후반을 평가할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 오경임 작가의 단편동화 <가마솥(2001)>[43], KBS1 TV소설 <은아의 뜰(1998)>, KBS2 일요베스트 <봉상씨의 로맨스(1999)> 등이 있다.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21년 후인 2018년 11월,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IMF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했다. IMF 사태가 터진 지 21년 만에 영화 소재로 다뤄지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44] '재정국 차관'의 캐릭터 설정은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 강만수에서 따왔다 볼 수 있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상술한 옛 교과서의 왜곡 서술과 엮어 생각하면 묘하다. 영화에서도 짤막하게 책임전가가 엉뚱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는 듯한 묘사는 있다. 강만수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또 한번 예산 60조를 날려먹는다. 이 영화에서는 IMF 대신 차라리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배째라 모드로 나갔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다. 영화 자체가 비판받을 점이 많다. 문서의 비판 문단 참고.
2015년작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당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성동일이 코치 재계약에 실패했고, 성나정은 고려증권에 입사 합격했다가 취소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삼천포는 취업 재수를 했고, 조윤진은 월급을 제때 못받는 상황이 되었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기억의 밤도 외환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2020년작 tvN 수목드라마 <머니게임>에서도 해당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데, 주요 등장인물들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한스밴드의 1998년 1집 앨범 수록곡 <오락실>은 이 시기의 이른바 '오락실 출퇴근족'을 다룬 노래다.
2022년에 불가살 후속으로 방영할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IMF 사태로 인해 주인공의 펜싱팀이 해체되거나 가정이 몰락하는 내용이 나올 예정이다.
8. 참고 자료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주필/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