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물가가 높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외환보유액 잔고가 세계 8위 수준으로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수입 규모가 워낙 커 한꺼번에 외화가 빠져나갈 경우 일시적 부족 상태가 야기될 수 있는 만큼 미리 보수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국 외환관리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던 미국,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도 만료된 상황에서 긴축발작이 일어나면 의외로 충격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IMF는 "미국에서는 광범위한 임금 인상과 지속적인 공급 병목 현상이 나타나 예상보다 빨리 물가가 오르고 있어 금리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 등 긴축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그 강도도 더 세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신흥국들은 잠재적인 경기 충격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IMF는 이어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은 금융 시장에 충격을 주고 전 세계의 재정 상황을 뒤흔들 수 있다"면서 "특히 금리인상은 미국의 수요와 무역 둔화로 이어질 수 있고 신흥국 시장의 자본 유출과 통화 가치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IMF는 또 "빚이 많고 경상수지 감소 등을 겪는 저성장 신흥국들은 이미 달러 대비 환율 변동이 큰 상황"이라며 외화 부채가 많은 국가들은 가능한 한 환노출을 피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IMF의 이 같은 경고는 연준 FOMC가 본격적으로 금리인상과 양적 긴축에 나설 경우 2013년의 테이퍼 탠트럼과 같은 후유증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를 공식화했던 2013년 5월 많은 신흥국들이 긴축발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미국 금리가 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신흥국에 투자했던 돈을 급히 미국으로 옮겼다. 그 결과 신흥국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증시 또한 크게 추락했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연준이 3월부터 금리인상에 나서 올해 중에만 모두 4차례 기준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연준이 3월과 6월, 9월 그리고 12월에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준의 대차대조표 축소 시작 시기도 12월에서 7월로 앞당겨질 것으로 내다봤다. 골드만삭스의 이같은 전망에 뉴욕증시는 비상이 걸렸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나스닥 다우지수는 물론 국채금리 환율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도 금리인상의 공포에 휩싸인 모습이다.
연준은 앞서 지난 5일 공개한 FOMC 정례회의 의사록에서 "경제, 노동시장, 인플레이션 전망을 고려할 때 앞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일찍 또는 더 빠르게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FOMC에서 일부 참석자들은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한 후 상대적으로 조기에 연준의 대차대조표 규모를 줄이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롬파월 연준의장은 양적 긴축은 올해 말 경에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CPI 소비자물가지수가 계속 오르면 양적긴축의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미국 연준이 테이퍼링의 속도를 높이고 금리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를 공언하면서 긴축발작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급격한 외국자본 이탈로 신흥국에서는 외환부족에 의한 디폴트나 국가부도의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 양적 축소 긴축발작의 와중에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할까? 국가의 디폴트나 부도는 외환보유액 부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11일 현재 4631억200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절대 액은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다.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를 직접 찍어내고 있는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9번째로 많다. 지금 당장 긴축발작이 터져 외화가 빠져나간다 해도 일단은 방어할 수 있는 규모이다.
우리나라가 국가부도상태에 빠져 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1997년 당시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였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의 외환보유액은 100배 이상 많다. 그동안의 달러 인플레를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외환보유액 상황은 상당히 여유가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보다 외환보유액이 더 많은 나라는 중국, 일본, 스위스, 인도, 러시아, 대만,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정도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가 이들 나라보다 현격하게 높다는 사실이다. 무역의존도는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총량을 국내총생산 즉 GDP로 나눈 것이다.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100% 내외로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본의 해외의존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긴축발작과 같은 유사시에 수출 대금이 제때 안 들어오면 외환보유액으로 빠져나가는 외환의 수요와 수입대금을 지불할 수 있어야 외환위기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간 수입물량은 5000억 달러 선이다. 여기에 자본이탈에 따른 외화지급 수요까지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외한보유액은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흘러넘치는 상황도 아니다. 달러 강세를 의식하여 외국인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면 현재의 외환보유액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우리 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해 통화 스와프를 맺어왔다. 통화 스와프란 국가들끼리 서로의 통화를 비상시에 일정기간 빌리거나 빌려주기로 하는 계약을 말한다. 스와프의 사전적 뜻은 ‘바꾸다’ 또는 ‘교환하다'이다. 경제 용어로는 ‘두 당사자가 각각 가지고 있는 미래의 현금 흐름을 서로 맞바꾸기로 합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스와프에는 금리스와프와 외환스와프가 있다. 일본에서는 이웃집 부부들끼리 일정기간 배우자를 바꾸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을 부부스와프라고 부른다. 국가 간의 통화 스와프 협정은 필요할 때 두 나라가 자국 통화를 상대국 통화와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국과 미국은 2020년 3월 19일 코로나19 여파로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그 방어책으로 6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스와프 계약기간은 그해 9월까지였다. 이후 두 차례 연장되었으나 한-미 통화스와프가 지난해 연말로 종료됐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 속에 금융위기 차단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왔던 ‘전가의 보도’ 같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공교롭게도 미국 연준이 대차대조표 축소를 통한 양적긴축의 카드까지 꺼낸 이 엄중한 시기에 한-미 통화스와프가 끝난 것이다. 거대한 안전판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미국이 빠지고 나면 우리나라의 통화스와프 규모는 사전 한도가 설정되지 않은 캐나다와의 계약을 제외할 때 1382억 달러로 줄어든다. 유사시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공신력이 높은 미국 달러와 일본 엔화가 동시에 빠져있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는 한일 외교마찰 와중에 소리 소문없이 끝나버렸다. IMF 체제에서 가장 공신력이 높은 기축 통화역할을 하는 두 나라와의 통화스와프가 없는 상태에서 긴축의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나라는 스위스 중국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UAE 그리고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 소속 국가들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이들 국가의 신용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한 마디로 '앙코 빠진 찐빵'이다. 국제 금융질서는 좋든 싫든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를 사실상 지배해 오고 있는 브레튼우즈와 IMF 체제의 엄중한 현실이다.
미국 연준 FOMC는 테이퍼링의 속도를 가속화한 데 이어 금리인상의 시기를 앞당기고 그 횟수도 늘리겠다고 밝히고 있다. 거기에 대차대조표 축소라는 양적 긴축까지 단행하면 신흥국의 달러가 한꺼번에 미국으로 역류할 수 있다. IMF는 아시아 국가들이 긴축에 가장 취약하다며 연일 경고 신호를 날리고 있다. 이른바 긴축발작이라고는 테이프 탠트럼의 비상등이 도처에서 울리고 있다.
한국은행은 한-미 또는 한-일 통화스와프 없이도 우리 힘만으로 긴축발작의 파고를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한은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국가부도가 터지면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만사 불요튼튼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