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는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어느 먼 산 뒷옆엣는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일제 말기 만주에 살던 백석은 신의주로 돌아와 어느 목수네 집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지나온 삶을 반추한다. 백석은 생각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비록 세상과 시절이 자신을 춥고 구차한 현실로 데려왔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떠올리며 자신을 추스른다.
갈매나무는 시인의 호명으로 세상에 드러난 나무지만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지난여름, 숲 친구들과 함께 청계산 계곡으로 갈매나무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인 갈매나무는 서리(鼠李)라고도 불리는데 비교적 추위를 잘 견딘다. 아마도 북녘지방 사람인 백석에게는 세한(歲寒) 시절의 벼리가 될 만한 나무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석의 화자는 ‘굳고 정한’ 영혼의 푯대처럼 보이는 갈매나무와 그렇지 못한 자신의 차이를 반성하면서 갈매나무의 영혼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세한의 시절을 견디려고 했던 것 같다.
조금만 추워도 호들갑을 떠는 우리와는 달리 나무들은 북풍한설에도 추위와 당당하게 맞서며 묵묵히 추운 계절을 잘 견뎌낸다.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처럼 땅속 깊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미리 준비하여 잘 적응한 덕분이다. 뿌리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식물의 밑동으로서 보통 땅속에서 식물체를 떠받치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기관’이라 정의되어 있다. 비록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는 수관이 울창한 만큼, 어려운 환경을 견뎌낸 만큼 깊고 견고하다. 대개의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펼친 만큼 뿌리를 뻗는다고 한다.
이처럼 단단한 뿌리는 나무의 삶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존재지만 더 중요한 것은 원뿌리에서 분지한 곁뿌리, 다시 여기서 나온 잔뿌리들이다. 잔뿌리 끝의 표피세포는 머리카락처럼 가는 뿌리털과 생장점, 생장점을 덮어 보호하는 뿌리골무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면적을 증가시켜 물과 무기물을 흡수함으로써 나무를 살아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토록 작고 섬세한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산을 오를 때 종종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수직의 암벽 틈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이 선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도, 그 시작은 나무의 여리고 가는 뿌리 끝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가 춥고 힘든 요즘이다. 백석이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추운 겨울을 견딘 것처럼 힘들고 어려울수록 자신을 지탱해 줄 깊고 단단한 뿌리를 생각하고 꽃 피는 봄날의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