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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눈 내린 겨울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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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눈 내린 겨울 숲에서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오랜만에 제법 큰 눈이 내렸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아니면 눈이 내리기 무섭게 염화칼슘을 뿌려대는 부지런한 도로관리자 때문인지는 몰라도 도시에선 좀처럼 쌓인 눈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모처럼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눈은 잿빛 도시의 풍경을 한순간에 동화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앙상하던 나목의 가지마다 풍성하게 흰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조붓한 골목길에도, 쓰레기가 가득 담긴 종량제 봉투 위에도 눈은 마치 흰 천으로 모든 물상을 다 감싸듯 내려 쌓인다. 세상 모든 것을 눈으로 덮어놓고 만물이 잠든 속에서 다시 시작을 준비하는 듯하다. 그래서 눈 내린 아침은 세상의 첫 아침처럼 경건하고 거룩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눈 내린 겨울 숲을 보러 가지 않을래?”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은근히 설레던 참이었는데 전화를 걸어온 친구의 제안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눈이 그친 뒤 서둘러 스틱을 챙겨 집을 나섰다. 일부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골목길을 골라 걸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눈을 찾아 밟으며 친구는 눈이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큰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때로는 그 선물로 인해 숲의 나무들은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눈은 내릴 때는 솜털처럼 가볍지만 쌓이면 엄청난 무게로 인해 나무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려 나뭇가지에 쌓이면 솜사탕보다 가볍던 눈의 무게가 가지를 부러뜨릴 만큼 무거워져 나무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심지어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뿌리째 뽑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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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만일 눈이 내리지 않은 채 추위가 이어진다면 땅은 꽝꽝 얼어붙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땅속의 씨앗들, 구근 같은 생명의 저장고들은 모두 얼어 죽어 새봄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이 내려 대지를 푸근히 덮어주어야만 땅은 길고 따뜻한 털로 덮인 북극곰처럼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겨울을 두고 아무것도 길러내지 못하는 불임의 계절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겨울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여름의 무성한 초록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벌거벗은 채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벌레들은 알을 슬어놓고 죽거나 고치를 짓고 그 속에 들어가 잠든다. 만물을 흰 시트 자락으로 덮고 그 밑에서 생명이 죽음에서 부활을 잉태하는 시기가 다름 아닌 겨울인 셈이다.

눈이 내린 숲은 빛바랜 낙엽들과 벌거벗은 나목들이 묵상에 잠긴 겨울 숲의 쓸쓸한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하늘을 비질하던 빈 가지마다 하얀 눈꽃을 피워 달고 선 나무들의 변신도 놀랍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눈가루를 뿌려댈 때면 마치 짓궂은 장난꾸러기 아이 같다. 그런가 하면 적막도 길을 멈춘 듯한 차고 정한 눈 내린 숲의 정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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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익숙하던 길도 서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눈이 덮인 길은 자칫하면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 내린 아침이 세상의 첫 아침이라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눈 내린 세상의 길은 모두 새 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면 처음이어서 낯설고, 낯설어서 새로운 눈길을 걸어볼 일이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눈 내린 겨울 숲길을 걸어볼 일이다. 눈 내린 겨울 숲에서 온전히 시간 속에 자신을 맡기고 눈길을 걸으며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빛과 향기와 음률을 생각해볼 일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