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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배롱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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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배롱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배롱나무꽃이 피었다. 우리가 궂은 장맛비와 폭염에 시달리느라 무심한 사이, 배롱나무는 어김없이 꽃송이를 피어 달고 여름 뜨락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처럼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다. 이제 장마가 끝나가는지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뭉게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쪽빛 하늘이 보이고 저녁 무렵이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잠자리 떼가 맴을 돈다. 배롱나무꽃들이 시나브로 마당에 떨어져 쌓이며 장난처럼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지만 이제 끝이 보인다고 바투 잡았던 마음의 고삐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배롱나무가 그 자잘한 꽃송이들을 쉬지 않고 피워올리며 뜨거운 여름을 건너가듯 우리도 마음속에 희망의 꽃을 내어 달며 이 지루한 여름을 건너가야 한다. 속절없이 지는 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날마다 새로운 꽃으로 꽃 진 자리를 메우며 늘 환하게 빛나는 배롱나무처럼 꿋꿋하게 이 여름을 건너가야 한다. 아직도 여름은 끝나지 않았고, 가을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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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물러갔으니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지만 B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게 상책이다. 비가 와도, 햇볕이 쨍해도 투정 부리지 않는 꽃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의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한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꽃처럼 밝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걸으며 작은 숲이 있는 공원 산책을 하며 새로 피어난 꽃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게 요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화분에 담긴 채 피어난 보랏빛 도라지꽃이라든가 시름을 잊게 한다는 원추리꽃, 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할 뿐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 연못엔 수련과 노랑어리연꽃도 피어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핸드폰에 담아 온 꽃 사진을 정리하는 데에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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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조금만 눈여겨보면 꽃은 어디에나 피어 있다. 가로변엔 무궁화 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고 중랑천변엔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삶에 지쳐 마음 밭이 메말랐거나 자연에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에서 이르기를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힘겨운 삶이지만 꽃을 보는 사람은 꽃에 눈 감은 사람보다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꽃을 보는 일은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쉼표를 찍는 일이자 자연에 눈을 뜨는 일이기 때문이다.

꽃들이 지닌 미덕 중의 하나는 절대로 불평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꽃들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꽃을 피운다. 목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가 석 달 열흘 붉을 수 있는 것은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꽃을 피워서가 아니다. 꽃 하나는 더없이 여리지만 날마다 새로운 꽃을 끊임없이 피워 백일을 붉고 환한 꽃나무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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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자연 속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여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삶이 팍팍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무작정 집을 나서 걷는 게 상책이다. 걷다 보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되고 마음도 차분해진다. 그렇게 걷다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꽃들이 하나 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