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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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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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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봄은 향기로 오고, 가을은 소리로 온다’는 말이 있다. 만물이 소생하고 다투듯 피어난 온갖 꽃들이 만발한 봄엔 어딜 가나 꽃향기가 진동하며 후각을 자극한다. 거기에 비하면 가을은 바람 소리에 실려 온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날 때 우수수 지는 낙엽들, 그 낙엽을 밟는 소리, 깊은 밤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가을이 왔음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국화 향기를 한 번이라도 맡아본 사람이라면 가을 향기도 봄꽃 못지않다는 걸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화 향기는 요란스럽지 않고 따순 가을볕처럼 은근하면서도 오래 간다. 그래서 그 향기에 한 번 스치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난 주말, 모처럼 친구와 교외로 나가 식사를 했다. 햇빛 속을 걸으며 길섶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며 담소를 나눴다. 산들바람을 타는 코스모스와 쑥부쟁이, 주황색의 유홍초와 메리골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들임에도 친구는 처음 보는 꽃인 양 신기해하며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꽃 이름을 묻곤 했다. 도시에서만 살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여기에 오니 가을이 오는 것을 알겠다고도 했다. ‘문득 돌아보니 가을이더라’라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도회지에서 바쁘게 살다 보면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살기 십상이다. 그래서 꽃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겐 봄도 가고, 여름도 가는 ‘가는 세월’ 뿐이지만 꽃을 보는 사람들은 새로 피어날 꽃들을 기다리다 보면 봄도 오고, 가을도 오는, 빠짐없이 계절 마중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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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꽃이 눈에 들어오고, 남자 나이 쉰이 되면 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비로소 자신의 시선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시그널인 셈이다. 이십 대의 열정으로 뜨겁게 사랑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다 보면 삼십 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게 마련이다. 거울 한 번 들여다볼 틈도 없이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 속에 청춘도 함께 흘러갔다는 걸 자신만 모르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들꽃이다. 비로소 가족이라는 울타리 너머의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을 바라보는 나이가 쉰이라고 한 것은 인도 사람들이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진 지금은 약간 다를 수는 있겠지만 예전의 농경사회에선 쉰 살이면 자식들도 성장하여 가정을 꾸려 독립할 즈음이다. 불교 국가인 인도에선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나면 산으로 들어가 수도를 하며 생을 마치는 게 모든 이의 바람이었다. 자신이 지고 있던 짐을 다 벗어 버리고 자아 찾기에 돌입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늘 꽃을 보고 산을 바라보며 살던 옛사람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계절마저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겐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꽃을 보는 일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라 오고 가는 계절을 알아차리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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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최고의 영적 스승으로 불리는 인도의 철학자이자 명상가인 라즈니쉬는 그의 책 ‘잠에서 깨어나라’에서 “행복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은 바로 지금,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했다. 불행은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이지만, 행복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어느 날 문득, 꽃이 눈에 들어온다면 라즈니쉬가 남긴 이 말을 떠올리며 꽃을 보시라 권하고 싶다.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단지 현재에 살라. 그러면 모든 과거도 모든 미래도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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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