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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입동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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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입동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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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입동(立冬)'이 지났다.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되었다. 거리엔 흩날리는 낙엽들이 늦가을의 엔딩 크레딧처럼 거리를 떠돌지만 절기로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다. 봄꽃보다 화려하던 오색단풍도 사라지고 축제가 끝난 공연장처럼 어지러이 흩어진 낙엽들이 스산함을 더하며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비 한 번 지날 때마다 기온은 급전직하로 내려가고 한기를 품은 바람은 점점 더 기운을 얻어갈 것이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나라 시인 이백은 '입동'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얼어붙은 붓 갓 지은 시 써 내려감이 더디고(凍筆新詩懶寫)/찬 화롯불 좋은 술에 시절이 따사롭다(寒爐美酒時溫)/술 취한 눈으로 내다보니 하늘은 검고 달빛 밝아(醉看墨花月白)/마치 흰 눈 내린 듯, 마을 앞 가득하다(恍疑雪滿前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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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무렵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때이다. 물이 부족한 건조한 겨울철에 수분이 잎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가 잎을 떨구듯이 체온 유지를 위해 두툼한 겨울옷을 꺼내어 입을 때가 되었다. 어느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고 낭만적으로 노래했지만, 나뭇잎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것은 나무가 스스로 에너지를 지키는 방식이자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래서일까. 입동 무렵의 허룩해진 나무들을 보면 욕심 때문에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내 안을 살피게 된다.

이제 월동 준비도 해야 하고 급격한 기온 변화로 자칫하면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아직은 기온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곧 추위가 닥칠 것이다. 왔는가 싶으면 이내 가버리는 가을이 아쉬워 틈나는 대로 숲을 오가며 부지런히 가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독감 주사와 코로나 백신도 접종을 마쳤다. 나름의 겨울 채비를 한 셈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월동 준비를 어찌하는가에 따라 봄의 기운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단단히 준비하지 못하면 새로 오는 봄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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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닥치기 전에 가을 정취를 즐기려고 산을 오르다 선홍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그냥 바라보아도 꽃보다 고운데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은 선홍의 단풍잎을 햇살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그리 예쁠 수가 없다. 서둘러 역광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도 담지 못한 아름다운 단풍의 자태는 고스란히 가슴에 남았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는 게 평소의 지론이지만 그 고운 단풍을 본 뒤 햇살 받은 단풍잎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뒷모습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하나 더 생겼다.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나뭇잎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생진 시인은 '벌레 먹은 나뭇잎'을 두고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이라서 별처럼 예쁘다'고 했지만, 상처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인이 아니라면 상처가 보이지 않는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아야 제대로 단풍을 즐길 수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단풍 구경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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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둘레길을 걷다가 북한산의 인수봉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산을 올랐다. 무작정 높이 올라가면 제대로 보일까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때로는 나뭇가지에 가리고, 때로는 바위에 가려져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찾기까지 한참을 헤매야만 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며 추운 계절을 잘 건너가야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