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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초겨울의 천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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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초겨울의 천변 풍경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바람 끝이 차고 맵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의 서늘한 기운 속에 겨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동안 이상기온으로 겨울로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을 지나 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도 무색하리만치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었다. 천변에는 여전히 초록의 풀들이 무성하고 때를 잊은 꽃들이 무시로 피어나 이대로 겨울이 실종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다. 조금 늦춰질 수는 있어도 겨울 없이 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거리엔 쌀쌀해진 외기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두툼한 겨울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 추운 계절을 무탈하게 건너기 위해 몸과 마음의 단속을 단단히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마음의 물살이 여울물 소리를 내며 급하게 흐른다. 딱히 이룬 것도 없는데 유행가 가사처럼 ‘벌써 일 년’이 후딱 지나버린 것만 같아 못내 아쉽고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감나무 가지 끝의 까치밥으로 달린 홍시를 보거나 잘 익은 모과를 볼 때면 나의 빈 주머니가 문득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무탈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별 탈 없이 겨울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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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방학천을 내려가 중랑천을 거슬러 오른다.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천변을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가로변의 낙엽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는 것과 달리 천변엔 아직 초록의 풀들이 무성하다. 찬 서리 한 번 내리고 나면 곧 스러질 텐데 한 줌의 햇살도 헛되이 쓰지 않는 초록 목숨의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노란 애기똥풀과 보랏빛 수레국화, 때를 잊은 금계국이 소슬하게 피어 있는 천변을 걸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억새꽃이 바람을 타고 먼 하늘엔 기러기가 날고 있다.

천을 가로지른 보 위엔 민물가마우지들이 나란히 앉아 젖은 깃을 말리고 있다. 여름내 밀려와 쌓인 모래톱엔 외발로 선 채로 깊은 묵상에 잠긴 왜가리의 모습도 보인다. 야외 활동이 줄어드는 겨울철에 새들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새삼 알게 된다. 왜가리는 예전엔 여름철 물 맑은 시골의 논두렁과 개울에서 자주 보이던 여름 철새였다. 민물가마우지도 역시 중국과 러시아에서 겨울철 날아와 주로 해안가에서 겨울철을 나던 철새였다. 하지만, 이제 두 새는 도심과 농촌 할 것 없이 골고루 서식지를 넓히면서 어엿한 텃새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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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에 서서 물새들을 관찰하다가 한가로이 물 위를 떠다니는 한 쌍의 원앙을 보았다. 예로부터 원앙이 부부 금슬의 상징이 된 것도 물 위를 노니는 원앙의 모습에서 행복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실제의 원앙은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바람둥이라고 한다. 원앙은 월동지에서 짝을 결정한다. 암컷 주위에는 10마리 안팎의 수컷이 몰려들어 저마다 관 모양의 장식깃인 댕기 깃을 펼치거나 큰 은행 깃을 수직으로 세워가며 구애를 한다. 이때 암컷은 마음에 드는 수컷을 골라 짝을 짓는다. 원앙은 해마다 짝을 바꿀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짝을 바꾸는 주체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란 점이다.

‘과시’는 ‘자랑하거나 뽐내어 보인다’와 ‘사실보다 크게 나타내어 보인다’라는 의미다. 수컷 원앙이 아름다운 깃털을 과시하는 것도 실은 수수하기 그지없는 암컷 원앙에게 선택받기 위한 것이다. 외모의 화려함이 전부가 아님을 원앙에게서 배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