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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소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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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소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혹한의 추위다. 세상이 온통 냉동고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생각나는 유년의 기억 하나. 춥고 긴 겨울밤에 어머니와 나는 밤 깊도록 씨아질을 하곤 했다. 지금이야 인조솜이 많이 나와서 목화솜은 구경하기도 힘들어졌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직접 목화 농사를 지었다. 가을에 딴 목화로 이불솜을 틀기 위해 솜틀집으로 가기 전에 목화에서 씨를 바르는 작업을 해야 했다. 씨아는 목화씨를 빼는 기구이고 그 일을 일러 씨아질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양쪽에 달린 씨아의 손잡이를 돌리면서 두 개의 참나무로 된 가락이 맞물려 돌아가는 그 사이로 목화를 밀어 넣으면 솜만 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씨는 아래로 떨어지게끔 되어 있다. 씨아질을 하다 보면 손잡이를 돌리는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프고, 씨아 소리는 적막한 산골의 겨울밤의 정적을 깨곤 했다.

씨아는 우리나라 숲을 대표하는 두 종류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몸체는 소나무로, 씨를 발라내는 가락은 참나무다. 대패질이나 끌질이 용이한 소나무로 몸체를 만들고, 대단한 압착력을 견뎌야 하는 가락은 야물디 야문 참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농기구 하나 만드는 데에도 우리나라 숲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인 소나무와 참나무의 특성을 살려 만든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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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일찍이 율곡 이이 선생 같은 분은 세한삼우로 송(松), 죽(竹), 매(梅)를 꼽았으며 고산 윤선도의 다섯 벗 중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사철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야말로 선비의 기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나무로 안성맞춤이었기에 성삼문 같은 이는 죽은 뒤에 봉래산 제일 봉에 독야청청한 낙락장송이 되겠노라고도 했다. 그에 비해 참나무는 적잖이 홀대를 받아왔다. 참나무는 무른 소나무에 비해 대팻날도 허락지 않고 못도 받아들이지 않는 단단한 견목이지만 목질의 부식은 소나무보다 훨씬 빨라 재목감으론 부적합한 탓이다. 참나무는 기껏해야 숯을 굽거나 땔감으로 쓰이는 게 고작이었다.

기차를 타고 영주에서 강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봉화를 지나 춘양(春陽)이라는 작은 간이역을 만날 수 있다. 이 한적한 시골에 역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이 지방의 금강송을 실어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처로 실려 나간 소나무는 질이 좋아서 다른 지방의 금강송과 구별하기 위해 따로 '춘양목'이라 했다. 춘양목은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반가사유상을 만든 바로 그 소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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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을 이렇게 특별하게 여기는 까닭은 몸통 속 부분인 심재율이 일반 소나무보다 높고, 수피가 얇으면서도 나무가 터지거나 갈라지는 수축률은 낮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춘양목은 동해안 울진까지 올라와 있는 곰솔(해송)과 내륙의 적송(육송)이 자연교잡된 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춘양 지방에서도 춘양목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 춘양목이 숲을 이루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산간 마을 울진 소광리다. 소광리 소나무숲은 지난 1981년 ‘소나무 유전자 보존림’으로 지정된 이래 250그루의 춘양목이 씨받이 나무로 선택돼 꾸준히 후손을 퍼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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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소나무가 소나무의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병 때문에 앞으로 70년 후면 우리나라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솔수염하늘소를 매개로 번져가는 재선충병은 그 어떤 병해충보다도 소나무에 치명적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후손들은 추사의 세한도에 적힌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소나무를 식물도감의 멸종 식물에서 찾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런 염려가 기우이기를, 소나무의 푸르름이 세세만년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빈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