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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잔인한 달 4월, 그에 대한 ‘아련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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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잔인한 달 4월, 그에 대한 ‘아련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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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일 금융부 부국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4월만 되면 회자되는 토머스 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 피와 죽음으로 점철됐다. 필자에게도 4월은 잔인하면서도 학창 시절 가장 좋아한 중화권 연예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가슴 한편에서 밀려오는 달이다.
영화 ‘천녀유혼’과 ‘영웅본색’ ‘패왕별희’ ‘아비정전’ 등에서 열연을 펼친 그!

그가 한국에서 투유초콜릿 광고를 찍을 때 부른 ‘天使之愛(톈스즈아이)’는 어느덧 필자의 애창곡이 되었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고 있던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를 좀 더 알고자 필자는 만다린어(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됐고 중화권과도 연을 맺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2003년 4월 1일 홍콩스타 장국영(張國榮)이 세상을 떴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마침, 만우절이라 믿지 않고 해프닝으로 여겼다. 하지만 저녁 뉴스에서 사실로 확인되자 충격이었다. 장국영은 이날 오후 6시 40분쯤 홍콩섬 센트럴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46세의 나이로 투신자살했다.

더 큰 충격은 장국영이 사랑하던 사람이 여자가 아닌 ‘당학덕(唐鶴德)’이란 남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둘은 사랑싸움을 하고 장국영은 자살을 했다는 것. 믿을 수 없었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은 일상에선 중성적 성격의 '데이'였지만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를 열연하면서는 여성이 됐다. 경극 공연을 해가면서 그는 성 정체성이 흔들리고 동성애 성향만 강해졌다. 현실 속 장국영 역시 ‘동성연애자’였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영화 속 데이 모습이 곧 현실 속 장국영으로 투영됐다. ‘아픈 내면’을 감추고 대중 앞에서 ‘미소’를 띠어야 했던 패왕별희 속 데이처럼 현실 속 장국영도 대중 앞에선 마음을 감춘 채 애써 밝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숙연해졌다.

어떤 결과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장국영도 한때 여자를 사랑했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는 영화배우 모순균(毛舜筠)이다. 장국영은 여적TV 방송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자 애썼다. 하지만 청혼 단계에서 모순균과의 연은 끝났다. 그나마 장국영은 모순균과의 연을 영화에서 이어갔다.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장국영이 모순균이 진행한 토크쇼에서 “만약 내 청혼을 당신이 받아들였다면 지금쯤 내 삶이 어찌 됐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장국영은 모순균에 대한 애정을 계속 간직했다. 장국영의 그녀 모순균은 이후에도 화장품 회사 경영과 연예활동을 병행했다. 물론, 장국영이 모순균만 바라본 건 아니다. 모순균과 이별한 후 새로운 사랑을 시도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당학덕(唐鶴德)이다.

당학덕은 장국영의 어린 시절 지인이다. 장국영이 무명 시절 수입이 없어 힘들 때 당학덕은 자신의 몇 개월 치 월급을 주며 도왔다. 정작, 당학덕 자신은 몇 개월 동안 싸구려 도시락으로 끼니를 채웠다. 훗날 장국영은 인터뷰나 콘서트에서 당학덕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당학덕은 1982년 한 모임을 통해 장국영과 다시 만나 20년간 우정을 쌓았다. 장국영도 당학덕을 친구로서 존경하고 언론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우정을 과시했다. 장국영 사후 한 기자가 당학덕에게 “당신은 아직 장국영을 사랑하냐?”고 묻자 그는 분노했다. “아직이 뭔 말이냐. 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사랑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강조했다. 세간에선 당학덕이 장국영의 재산을 상속받고자 살인극을 벌였다는 루머가 돌았다. 경찰까지 나서 조사했지만 거짓이었다. 장국영 사후 그의 재산 460억원은 당학덕이 상속받았다.

장국영이 떠난 지 20년이 흘렀다. 당학덕은 1997년부터 장국영과 함께 살던 집에서 8년간 홀로 지내다가 장국영이 생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2011년에야 비로소 그곳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장국영 추모제 등 공식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현재 장국영의 유골을 소유한 것도 당학덕이다. 장국영 팬인 필자가 그렇듯이 어쩌면 당학덕에게도 4월은 잔인하면서도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희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heuyil@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