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릭 갈런드 미국 법무부 장관(71)이 20일(현지 시간) 미 하원 공화당 법사위 청문회에서 “나는 대통령의 변호사가 아니고, 의회의 검사도 아니다. 법무부는 미국 국민을 위해 일할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누구를 수사하고, 무엇을 수사할지 대통령이나 의회 등 그 누구로부터 오더를 받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판사였던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갈런드 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의 ‘아픈 손가락’으로 꼽히는 차남 헌터 바이든의 비리를 수사할 특검을 임명했다. 갈런드 장관은 이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의 기밀문서 유출 문제를 수사하도록 한국계 로버트 허 특검을 임명했다. 갈런드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위를 수사하는 특검도 지명했다. 이들 특검의 수사 결과는 오는 2024년 대선에서 재대결이 확실시되는 바이든과 트럼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갈런드 장관은 정통 법조인이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대법관 로클럭, 법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법무부 차관보 등을 거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바이든이 그를 선택하면서 “그가 정치적 인물이 아니고, 법무부의 명예와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법무부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갈런드는 장관직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들 헌터의 비리를 포함해 수사와 기소에 관한 모든 결정을 법무부가 독자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바이든은 갈런드에게 한 말을 지켰다. 갈런드 장관이 헌터를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기소한 데 이어 그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수사하면서 백악관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바이든 아들 문제로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가 희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과 갈런드의 관계가 소원한 것을 넘어 완전히 냉각됐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갈런드가 법무부에 백악관이 침범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은 갈등과 긴장 관계인 게 일반적이다. 법무부 장관은 취임하면 사법의 칼날을 대통령에게 겨냥하기 일쑤다. 트럼프는 상원에서 자신을 최초로 지지했던 제프 세션스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을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세션스는 트럼프와 러시아 간 미국 대선 결탁 수사로 충돌하다 쫓겨났다. 세션스의 후임 윌리엄 바는 트럼프와 지나치게 밀착돼 있다는 비판에 시달리다 트럼프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관련 스캔들과 관련된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던졌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에는 재닛 리노 당시 법무부 장관이 8년 동안 재임했다. 하지만 리노가 트럼프의 부동산 비리 의혹 화이트워터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또 모니카 르윈스키 인턴과의 성 추문 의혹을 파헤치도록 특검을 임명해 클린턴을 의회의 탄핵 심판대에 세웠다.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는 역시 흑인 출신의 에릭 홀더를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두 사람은 사석에서도 자주 어울리는 친구 사이여서 홀더는 늘 미국 정치권의 비판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개인 비리가 없어 법무부 장관과 충돌할 일이 아예 없었다.
갈런드 장관을 비롯한 미국 법무부 장관들을 보면 윤석열 대통령의 ‘명언’이 떠오른다. 윤 대통령이 일선 검사 시절인 2013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법무부 장관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전통을 지키려고 살아있는 권력에 맞선다. 미국 민주주의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법무부 장관이 이를 지키는 든든한 보루로 남아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