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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12·12사태 "서울의 봄" … 한국은행 금통위 발권력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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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12·12사태 "서울의 봄" … 한국은행 금통위 발권력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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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증시
요즘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수성한 가운데 개봉 20일째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집계에 따르면 '서울의 봄'은 이날 0시 기준 누적관객수 70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 '범죄도시3'에 이어 흥행 2위를 달리고 있는 '서울의 봄'은 최근 '싱글 인 서울' '괴물' '나폴레옹' '3일의 휴가' 등 신작들의 공세에도 흔들림 없는 인기를 보여줘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개봉주 주말(149만4232명)보다 3주차 주말(150만279명)에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며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열렬한 관심을 쉽게 알게 했다. 영화 '서울의 봄'은 2020년 팬데믹 발생 후 개봉한 '범죄도시2'(2022), '한산: 용의 출현'(2022), '공조: 인터내셔날'(2022), '범죄도시3'(2023) 등 전작이 있는 속편이 아닌 한국 영화 중에서도 유일하게 700만 관객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7번방의 선물'(21일차 700만 돌파), '광해, 왕이 된 남자'(21일차 700만 돌파), '왕의 남자'(33일차 700만 돌파) 등 역대 1000만 영화들의 흥행 속도보다 빠르게 700만 관객을 뛰어넘어 앞으로의 흥행세가 더욱 주목되고 있다.
김성수 감독이 연출을 맡고 황정민·정우성이 주연으로 나선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다.

지금으로부터 꼭 44년 전인 1979년. 연말을 맞아 세모 분위기가 흥청이던 그해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 이른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이 서로 싸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까지 체포하여 그로 하여금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2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됐다. 유병현·황영시·김복동·유학성·박준병 등도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실시해 국가 권력을 탈취한다. 그다음 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우리 역사의 큰 변곡점이었던 이른바 12·12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한밤중에 벌어졌다. 그때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몇 달 전 세상을 떴다.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1989년 12월 12일 이번에는 경제계에서 12·12사태가 터졌다. 12·12 군부 쿠데타 10주년이기도 했던 그날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증시 안정화 대책이란 것을 발표했다.

장소는 서울 남대문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 이규성 재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이규성 장관의 증시 안정화 대책에는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 통화증발 ▲투신사에 대한 은행의 자금 무제한 공급 ▲ 투신의 주식매입 ▲시가발행 할인율 확대 등의 슈퍼 메가톤급 증시 부양 조치가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은행 금고를 활짝 열어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주식매입 자금을 무제한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통화량을 무한정 찍어내겠다는 것이었다. 금리 인하보다 수십 배 파급효과가 큰 정책이다.

이 발표 이후 은행들은 실제로 2조7000억원을 3개 투신사에 주식매수 자금으로 빌려주었다. 당시 2조7000억원은 그때 우리나라 모든 상장사의 시가총액 합계액의 2.8%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투신사들은 그 돈으로 주식을 닥치는 대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투신사들이 주식을 대량으로 사 모으자 주가는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의 증시 안정화 대책이 효력을 보는 듯했다. 12·12대책 이후 사흘 동안 코스피가 100포인트 올랐다. 약발은 그때까지였다. 영업일 기준으로 나흘째 되는 날부터 오히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부양책을 틈타 손을 털고 빠져나간 투자자들이 많았다.

이규성 재무부장관은 여기에 또 4조원 규모의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증시의 둑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스피는 그로부터 2년 반 동안 계속 추락했다. 1992년 8월에는 역사적 저점인 456포인트까지 내려앉았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산 투신사들은 모두 파산했다.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의 원리와 시장 메커니즘에 반하는 무리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헌법을 유린한 하나회의 12·12 군사 쿠데타와 너무도 닮았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증시 안정화 대책을 ‘증권판 12·12사태’라고 부르고 있다.

무리한 정책의 대가는 실로 컸다. 그 부작용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환란이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원인으로까지 작용했다. 정부가 잘못 개입할 때 나라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12·12 경제 쿠데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장 실패는 정부의 개입으로 수정할 수 있다. 정부 실패는 과연 누가 수습해줄 것인가? 경제 쿠데타로 인한 손실은 과연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미국 뉴욕증시에서는 지금도 한국의 경제 쿠데타 12·12사태를 정부의 무리한 개입이 야기한 시장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