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등 명문 대학은 거액의 기부금을 쌓아 놓고 있다. 기부금 액수는 명문대의 기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들 거액 기부자 중에는 그 대학 졸업생이 많다. 이들이 기부금을 내세워 대학 운영에 개입하고 있는 현실이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게이 총장은 하버드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으로 아이티 이민 가정 출신이다. 그는 프린스턴대에 진학했다가 스탠퍼드대에 편입해 경제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탠퍼드대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하버드대 교수를 지내다가 지난해 9월 말 하버드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애크먼은 쿠팡이 뉴욕증시에 상장되기 전에 이 회사 주식 1000만 달러(약 129억5000만원)어치를 하버드대에 기부했다. 이때 대학 측과 이례적인 계약을 맺었다. 쿠팡 주식이 상장돼 1500만 달러 이상으로 가격이 뛰면 1000만 달러를 뺀 나머지 자산을 애크먼이 원하는 데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쿠팡 주가는 뉴욕 상장 당시 대박을 터트렸고, 애크먼이 기부한 주식 가치는 한때 8500만 달러(약 1100억6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애크먼은 7500만 달러 차액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경제학과 전용 빌딩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지난 2020년에 애크먼에게 일절 통보하지 않은 채 쿠팡 주식 1000만 달러어치를 매각했다고 WSJ가 전했다.
애크먼은 하버드대에 서한을 보내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하버드대는 그런 애크먼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이번에 게이 총장의 유임을 결정했다. 하버드대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인 유펜은 거액 기부자인 로스 스티븐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매길 총장을 경질했다. 스톤리지자산운용 창립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븐스는 1억 달러(약 1300억원) 기부를 철회하겠다고 압박해 매길 총장을 물러나게 했다. 스티븐스는 기부금을 주면서 대학 측이 스톤리지의 비즈니스와 명성을 해치면 기부금을 회수하겠다는 조건을 달았고, 이번에 이 조항을 무기화했다.
하버드대와 유펜의 이번 사태는 미국 명문 대학의 민낯을 드러냈다. 우선 이들 대학이 거액 기부자의 영향력으로 인해 자율성을 상실했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대학에서 학문의 자유가 심판대에 섰다”고 비판했다. 한국의 대학들도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