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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렌즈] 드라마 '성난 사람들'과 트럼프의 'M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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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렌즈] 드라마 '성난 사람들'과 트럼프의 'MAGA'

오늘을 사는 미국인의 분노가 배경, 한국 총선에서도 '분노'가 핵심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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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지난 1월 15일은 마틴 루터 킹 데이였다. 비폭력 흑인 민권 운동가로 미국 인권운동의 한 획을 그었던 킹 목사의 생일을 기념하는 법정 공휴일이다. 바로 이날 미국 정치와 문화 예술계에서 동시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첫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이 치러진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1%의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했다. 미국 주요 언론은 아직 나머지 49개 주와 워싱턴DC 경선이 남았지만,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자리를 사실상 굳혔다고 보도했다.
로스앤젤레스(LA) 피콕 극장에서 이날 열린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에서는 한국계 감독과 주연배우가 활약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이 작품상과 남녀 주연상을 포함해 8관왕을 쓸어 담았다.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에서 '성난 사람들'은 한국계 이성진 감독이 감독상과 작가상을 받고, 한국계인 스티븐 연이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중국·베트남계 배우 앨리 웡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11개 부문 남녀 조연상과 음악상을 제외한 모든 상을 휩쓸었다.

기자는 미국 중부 아이오와와 서부 LA에서 일어난 이 두 사건이 묘하게 중첩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누가 조금만이라도 건들면 툭 터질 것 같은 오늘을 사는 미국 현대인의 분노가 두 사건 모두에 진하게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성난 사람들’ 1화 소제목은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라고 돼 있다. 가난한 핸디맨 대니스(스티븐 연)는 한국계 이민자로 미국에서 되는 일이 없어 늘 쫓기며 산다. 사업가인 에이미(앨리 웡)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지만, 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죄책감과 분노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대니스와 에이미는 운전하다가 사소한 시비가 생겨도 극단적으로 화를 낸다. 이런 스토리에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의 시청자는 자신이 거울에 비치는 듯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다.

올해 아이오와 코커스는 역대 가장 추운 날씨인 영하 20℃ 안팎의 혹한과 눈보라 속에 치러졌다. 이 엄혹한 날씨를 뚫고 투표장을 찾은 주민들은 ‘성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반드시 트럼프를 대선전에 내보내야겠다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트럼프의 선거 구호) 세력이 떼를 지어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 결과 트럼프51%의 득표율2위에 오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21.2%)를 29.8%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AP 보트캐스트가 아이오와 경선 참여자를 대상으로 조사 결과 62% 자신이 'MAGA' 지지자라고 밝혔다. 또 이들 응답자의 63%가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가 정당하지 않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급기야 민주당 지지자였다가 이번에는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 지지를 선언한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MAGA를 단순히 극성 세력이나 별종으로 치부하면 민주당이 11월 대선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MAGA는 그동안 저학력·저소득 백인 남성이 주축이었다. 이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여기에 고학력·부유층 등이 대거 가담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다. 이들이 ‘성난 사람들’을 시청하고, 위로를 받은 뒤 유일한 배출구인 투표소를 찾고 있다. 선거는 한마디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싸움이다. 한국에서도 ‘성난 사람들’이 4월 총선의 향방을 결정할 것임이 틀림없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